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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문학관

도시문제 해결의 장이 된 재생공간에서 만난 자연, 건축, 예술흔적의 물성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건축 공간

글 사진 동양미래대학교 건축과 이정미 교수 사진 이정미 도시문제 해결의 장이 된 재생공간에서 만난 자연, 건축, 예술흔적의 물성으로 정체성을 찾아가는 건축 공간 인왕산 자락 청운동에 강직하게 재생되어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을 찾아가 본다. <윤동주 문학관>은 재생건축물로, 1974년부터 2008년까지 청운동 수도가압장과 물탱크로 사용되던 공간을 리뉴얼하여 문학관이 된 건축물이다. ​ 고지대인 청운동에 원활하게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한 역할을 하던 이 수도펌프장은 2005년에 폐기되었다. 그 후 이 시설이 <윤동주 문학관>으로 바뀌게 된 것은 시인의 하숙생 시절의 인연으로부터 시작된다. ​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교원인 부친 윤영석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연고로 연세대학교에도 윤동주 시인의 시비와 기념 공간이 있다. 연세대학교 핀슨홀에 마련된 기념 공간은 건립 당시 기숙사로 사용되었는데, 대학 시절 윤동주 시인은 이 기숙사에서 3년 동안 생활하며 사색하고 고뇌하며 시를 썼다. 18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한 시인은 의과 진학을 원하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부의 도움으로 문과에 입학을 한다. 후배인 정병욱과 기숙사 시기에 만나 이후 깊이 사귀게 되었다. ​ 사진 이정미 1941년 25세 때 정병욱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 9번지에 있는 소설가 김송의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였는데 이 시기의 인연을 기려 종로구에 <윤동주 문학관>과 ‘시인의 언덕’이 조성되었다. ​ 졸업기념으로 자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3부를 작성하여 그 중 한 부를 정병욱에게 증정한 것이 현재의 유일한 원고가 되었다. ​ 일제의 탄압으로 창씨를 해야 했던 시기에 나이와 경제사정 등으로 망설이던 일본유학을 가기 위해 연희전문에 창씨계를 제출하고 쓴 시 ‘참회록’은 고국에서 쓴 마지막 작품이 되었다. ​ 일본으로 건너가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가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옮겨 학업하던 중 고향으로 돌아가려던 시기에 항일운동 혐의를 받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복역하였다. ​ 그러던 중 건강이 악화되어 해방되기 6개월 전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치고 만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에 묻혔는데 장례에서는 ‘우물 속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낭독되었다.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으로서의 그의 생을 담은 초간 시집은 종로구에서 하숙생으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이 자필 본으로 보관하고 있던 것을 발간한 것이다. ​ 종로구는 윤동주 시인이 종로구 누상동 하숙 시절 자주 산책하며 시상을 정리하던 인왕산 자락을 2009년 ‘시인의 언덕’으로 조성하고 시비를 세웠다. ​ 언덕 아래에 위치해 있던 수도 펌프실에서 2010년 <윤동주 문학관>의 현판식이 있었다. 현판식 당시 이곳 수도펌프실은 장판을 깔고 청소를 한 정도의 상태였지만 2012년 아틀리에 리옹 서울의 이소진 소장이 이곳의 설계를 맡아 리모델링하여 현재의 문학관을 완성시켰다. 2012년 7월 개관 이후 대한민국 공공건축 대상을 비롯하여 2014 서울시 건축상 대상을 받았고, 국가보훈처 현충 시설로 지정되었다. 사진 이정미 도심에는 기술의 발달로 산업구조의 패러다임이 변하면서 사람들의 의식 변화와 도시의 빠른 변화 과정 속에서 이 수도가압장처럼 기존의 기능을 다한 채 주변 지역의 이미지와 환경을 저해하여 버려지는 시설들이 자연스럽게 발생되었고, 이러한 유해시설들은 폐허로 도심에 남겨져 지역이나 도시 쇠퇴의 원인으로 지목되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철거되어 왔다. ​ 70년대 이후부터 해외에서는 이런 유휴시설의 사회, 문화, 정치적 가치를 인정하여 이러한 시설들을 도시문제 해결의 일환으로 받아들이며 재생의 대상으로 여겨오고 있다. 국내에서도 이런 시도들이 2008년 이후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에 파급되어 ‘지역 근대 유산 활용 문화예술 창작 벨트 조성사업’ 등을 통해 유휴시설을 전시 공간 및 문화 공간으로 개발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 아직까지는 국민들의 수요를 위한 공급보다는 발전 그 자체를 위한 공급에 치중하는 개발이 주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재생되어 활용되고 있는 <윤동주 문학관>을 통해 국내의 유휴시설을 활용한 전시 공간이 지니는 공간적 가치와 맥락의 보존, 재생된 다양한 방법들에 초점을 두고 살펴보려 한다. ​ 유휴시설이란 20세기 이후 쇠퇴한 산업이 발생하면서 기능을 상실하고 버려진 산업시설 공간을 말한다. 즉 유휴시설은 운행이나 기능을 쉬고 있거나 활용하지 않고 있어 멈춰있는 시설 공간들이다. ​ 발전소를 비롯하여 공장이나 탄광 같은 시설들은 그 역할의 쇠퇴로 인해 기능을 잃고 형태로만 존재하면서 역사적,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공간이 되었다. 그 중에서 물리적, 비물리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지역 내의 주요 지점에 입지하여 인프라가 잘 갖춰지고 건축적으로도 활용가치가 남아있는 공간들을 활용함으로써 시대가 변하여도 그 가치를 인정하여 재생하고자 하는 요구가 일어났다. ​ 재생 공간으로 탄생된 공간들은 기억의 저장창고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안양예술공원 입구에 위치한 우유산업 공장을 <김중업 박물관>으로 재생시킨 것도 한 예이다. ​ <윤동주 문학관>은 청와대 뒤편으로 청운동에서 부암동으로 넘어가는 창의문 못 미쳐 고갯길 왼편에 흰색의 아담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다. 대로변에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문학관의 외관은 주변이 사방으로 경사진 자연이라는 특성과 대조를 이루면서 단순한 직선의 육면체 형태를 하고 있다. ​ 한쪽을 열어 비대칭을 이루는 모던한 큐브의 열린부분에 난 창을 통해 서로 외부 맥락과의 반응적이고 역동적인 관계를 만들어낸다. 모노쿠쉬로 마감한 백색의 심플한 매스의 명암의 대비가 강력하다. ​ 사진 이정미 전시실은 세 개의 각기 다른 느낌의 큐브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외부 정면 파사드에서 보이는 우측 큰 큐브가 펌프실이었던 곳으로 제1전시실이 되었고, 좌측 작은 큐브는 부속 사무실 공간이다. 그 뒤로는 정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이 연결되어 있는 구성이다. ​ 제2, 3전시실은 물을 보관하던 물탱크 공간이었던 곳이다. 문학관 외부 좌측으로 난 거친 돌계단을 오르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연결된다. 사진 이정미 사진 이정미 2012년 리뉴얼하던 해 여름은 집중호우가 쏟아져 우면산이 무너져 내리고 비 피해가 전국적으로 극심했던 시기였다. ​ 제1전시실이 된 가압장 뒤편에 있던 5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옹벽의 안전을 확인해야 했던 과정에서 뜻밖에 발견된 5미터 콘크리트 옹벽으로 된 두 개의 물탱크 공간은 제2, 3전시실이 되었다. 이 두 개의 공간은 설계가 거의 끝나가던 시기에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 아틀리에 리옹 서울의 이소진 소장은 이 두 공간에 스토리텔링 기법을 적용하여 깜깜한 물탱크 공간 하나는 ‘열린 우물’을 콘셉트로 하여 자화상 속 우물로 연결했다. 그 뒤 또 하나의 우물은 ‘닫힌 우물’을 콘셉트로 하며 후쿠오카 형무소 개념으로 연결했다. ​ 이 제2, 3전시실은 전시품을 채우기보다 방문객의 해석을 중시하여 물탱크의 모습을 최대한 보존하였다. 그 결과 지역을 활성화시키면서 주변환경과도 조화를 이뤄냈다. 사진 이정미 고갯길에 팥배나무를 배경으로 단아하게 자리한 <윤동주 문학관>의 진입은 대로변에서 이면도로 쪽에 위치한 주출입구로 진행된다. 경사지를 걸어 계단을 통해 내부로 진입하면 안내데스크 공간이 있다. 계속하여 제1전시실로 진입하도록 공간은 연결되어 있다. 사진 이정미 사진 이정미 제1전시실은 가압장이었던 곳을 개관에 맞춰 전시실로 디자인한 곳으로 어둡게 연출된 공간이다. 제1전시실에 진입하면 안쪽 맞은편 벽에 유일하게 난 전면창을 통해 외부 자연이 관찰되고 대로변의 속도감 있는 도시맥락과 자연의 빛이 전시실로 유입된다. 외부에서 본 외관의 모습에서 대로변 쪽 한쪽을 열어 비대칭을 이루면서 심플한 매스에 난 창이 이곳이다. 이곳 외부에는 데크 공간을 배치하여 내부 공간에서 외부로의 확장을 극대화했다. ​ 윤동주 시인의 연대기와 유고집 그리고 직접 쓴 시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1전시실 초입에는 시인의 생가에 있던 우물을 옮겨와 시인의 시 ‘자화상’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 사진 이정미 사진 이정미 제2전시실 진입은 검은색 금속 프레임으로 시작된다. ​ 짧지만 좁은 터널 같은 통로를 지나면 제2전시실이 나타난다. 잠시 멈춰서 머뭇거리게 하는 공간이다. 머물러 서서 공간을 바라본다. 전시물들이 좁은 공간을 채우고 있는 어두웠던 제1전시실을 거쳐온 다음 만나는 제2전시실은 텅 비어 있다. 하늘만이 열려있고 5미터 높이의 노출 콘크리트 벽면에 시간의 흔적만이 켜켜이 쌓여있다 깜깜한 물탱크 박스였던 공간에 지붕을 모두 제거하고 뻥 뚫어 하늘을 열고, 바람과 별과 시가 있는 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자연의 빛으로 가득한 공간이다. 바닥에는 잔돌을 깔고 식물을 자라게 하여 빛과 맑은 공기로 공간을 가득 채웠다. ​ 관람객은 텅 빈 일상적이지 않은 비례의 공간에서 심리적 충격으로 경외감을 느낀다. 마치 현대작가들의 설치미술 작품을 접할 때의 충격 같은 느낌이다. ​ 근대산업사회가 만들어 놓은 설치미술 작품이라 해야 할 것이다. 설치미술이 공간과의 관계에서 해석되듯이 건축가가 이 공간을 비우면서 만들어 놓은 설치예술 작품이라해도 좋을 곳이다. 사진 이정미 사진 이정미 사진 이정미 제2전시실 초입에서부터 5미터 높이 벽을 따라 ㄱ자로 연결되는 좁은 경사로가 걷기를 강요하는 듯 하다. 경사로를 따라 비워진 공간을 지나 진행하다 보면 제3전시실의 무거운 철문을 마주하게 된다. ​ 잠시 위를 올려다 보면 하늘과 물탱크의 심플한 구조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어 경외감을 일으킨다. 경사로를 따라 벽면에 남아있는 수면의 레벨이 만들어 놓은 켜켜이 남은 세월의 흔적, 물탱크로 사용될 당시 점검을 위해 만들었던 틈과 사다리를 제거한 흔적이 남긴 시간과 사용에 대한 흔적이 켜를 이루고 있다. ​ 경사로는 낮은 경계를 최소화한다. 우측의 잔돌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자라 있는 식물의 모습은 인공의 물탱크와 자연이 대조를 이루며 황량함을 더 강하게 드러나는 공간으로 만든다. ​ 제2전시실에는 윤동주 시인의 그 무엇도 전시되어 있지 않으나 그의 삶을 생각하게 하는 공간이다. ​ 시인의 일대기를 둘러보고 지나는 과정에 있는 전시실이기에 윤동주 시인이 영감을 받고 조용히 시상을 떠올리던 감성이 이런 공간의 느낌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공간이다. ​ ‘하늘과 바람과별과 시’가 있는 공간이 제2전시실이라는 생각이다. 사진 이정미 사각의 수직성이 강한 아트리움 같은 이 비어 있는 공간은 제1전시실과 제3전시실에서 언제든 공유된 공공 영역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다. 경사로를 따라 이어 나타나는 철문을 열면 두 번째 물탱크였던 어두운 제3전시실이다. ​ 후쿠오카 형무소 시기의 고통스러움을 ‘닫힌 우물’로 스토리텔링한 공간이다. 어둡게 계획되어 암울함이 감도는 공간에는 영상을 통해 윤동주 시인의 삶을 담은 화면이 정면 벽에 상영된다. ​ 영상이 끝나고 나면 물탱크 점검을 위해 열려 있던 좁은 틈으로 한줄기 빛이 비춘다. 이 빛은 조국 해방을 꿈꾸던 희망의 빛을 연상시킨다. 무거운 철문을 뒤로 하고 제2전시실에 서서 올려다 보는 하늘이 아름답다. 사진 이정미 크지 않은 규모의 문학관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게 하는 구성이다. ​ 조국광복을 몇 개월 앞에 두고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한 시인의 인생을 되뇌이며 조국광복을 고민하던 시인과 아름다운 서정시를 표현했던 시인의 모습이 돌아서 나오는 길에 함께 오버랩된다. ​ 외부로 나와 문학관 좌측에 난 거친 돌계단을 오르면 자연안에서 차를 마실 수 있는 커피숍이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 - 남산[南山]골[谷] - 3편(최종)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경상북도 청도군 남산[南山] 골[谷] - 3편(최종) ​ 박윤제 Park Youn Jae ​ 청도 문화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 지난 호에 이어 도광23년에 새겨진 화산동문 (華山洞門)에서부터 모선동(慕仙洞)까지 굽이 굽이 마다에 새겨진 글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박윤제 청도 문화원장으로부터 들어보자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 산 계곡 곳곳이 신선과 연관된 글들이 새겨져 있다. 처음 나타난 음용지는 신선사상에서 나오는 용이다. 그리고 백석뢰를 비롯해서 취암과 질양석, 만옥대, 철주단과 유하담. 옥정동 그리고 일감당 용항 마지막에 금사계등은 완전한 신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며 끝으로 자시유인불상래와 봉림대 모선동은 신선과 관련된 도교의 내용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청도문화원장 박윤제 석문(石門) 산수정으로 가는 길목의 바위와 벼랑이 마치 문을 연상하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담쟁이 넝쿨이 우거진 곳을 그냥 지나치기 쉬워서 글이 있는 곳을 잘 알 수 없다. 하지만 남산계곡 정비사업을 하기 전에는 이곳이 통과하기가 옹색(壅塞)하여 좌우를 살펴가면서 지나갔으나 정비사업을 하면서 탐방객(探訪客)이 다니기 편하게 한다고 바닥에 돌로 메우고 흙으로 채워서 지금은 석문이라는 글을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 이곳은 시정(詩亭)이 있었던 자리이다. 여러 곳 바위에 당시 이곳을 탐닉했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시정의 옛 모습을 알려주고 있다. 옛 어른들의 말씀에 왜정시대까지만 하여도 청도의 유지들이 이곳에서 시를 지어 이 바위에 자기의 시작(詩作)을 걸어두고 감상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또 칭찬하고 술을 마시면서 늦은 봄부터 추렴을 하고 무더운 여름을 식히고 그리고 아름다운 가을을 마음껏 누리면서 그 정취를 즐겼다고 한다. ​ 이름이 각자(刻字)된 돌들을 둘러보면 이 골짜기에서는 비교적 넓은 지역이다. 이 지역의 윗목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산수정(山水亭)이라는 글이 새겨진 바위가 있다.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산수정(山水停) 산수정은 시정(詩亭)이 있었던 곳에 최근에 다시 정자를 지었다. 예전의 정자는 허물어져서 화양의 시계(詩契)를 모았던 사람들이 교촌리에 새로 만들어진 화강지 언덕에 누각을 다시 크게 짓고는 화악루(華岳樓)라 이름 하였다. 화악루 목재 일부는 산수정의 재목을 옮겨와서 누각(樓閣)은 새로 지었지만 산수정(山水亭)의 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최근에 자그마한 누각을 다시 지었다. ​ 옛날 산수정(山水亭)정자는 진사(進士) 최익주(崔翼周)가 창건하였는데 부근에 일대가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풍광이 밝고 아름다우며 시내는 온통 반석으로 깔려있다. 라고 하였는데 글은 다음과 같다. ​ (山水亭在郡西華陽面校村 進士崔翼周所創 附近一帶 山紫水明 風光明媚 沿溪有大盤石 延亘數里如 萬玉臺 石門 玉井洞 頗極奇觀 奇節景不可勝記 郡中人士修稧 四時嘯詠 亭今廢) 산수정(山水亭) ​ 소강 최익주(小岡 崔翼周) 四壁層巒一邊(사벽층만일변) 茅茨盡日鎖雲煙(모자진일쇄운연) 叱羊道士今何(질양도사금하처) 落雁遊仙更續緣(낙안유선갱속연) 不見纖塵蹊上到(불견섬진혜상도) 長留明月石頭眼(장류명월석두안) 春來莫放桃花水(춘래막방도화수) 恐被漁郞世外傳(공피어랑세외전) 사방 에워싼 봉우리 한 쪽으로 물 흐르고 초가 지붕엔 온종일 구름과 안개가 젖어드네 질양석의 도사는 지금 어디에 계신지 낙안봉에 노닐던 신선 인연따라 떠났네. 보이지 않는 가는 티끌 오솔길에 내려앉고 밤새 비춘 밝은 달 돌 머리에 잠들고 봄이 왔다고 복사꽃 핀 물가로 내쫓지 말게 부질없이 한가한 낚시꾼이라 세상에 전해질까 두렵다네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유하담(流霞潭) 산수정 정자에서 남쪽으로 내다보면 유하담(流霞潭)이라 새겨진 큰 바위가 보인다. 유하담이라고 하는 깊은 담(潭)를 이루고 있는 이곳은 옥정동(玉井洞)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높지 않은 층대를 이루고 떨어지는 물줄기는 안개처럼 동구 밖으로 나온다. 이렇게 안개를 만들며 밖으로 흩뿌려져 나오는 물은 곧 흐르는 안개의 모습을 말하는 유하담이라 하였던 것 같다. 유하란 말은 양웅(楊雄:한나라 때의 문장가)이 지은 감천부(甘泉賦)에 있다고 하는데 ​ 噏淸雲之流霞兮(흡청운지류하혜) 飮若木之露英(음약목지로영) ​ 맑은 구름 속 흐르는 안개를 들이쉬고 약목(若木, 해지는 곳에 있다는 나무)의 꽃다운 이슬을 마신다. ​ 옛날 청도의 선비들이 여기 시정(詩亭)에 앉아서 유하(流霞)의 안개를 맞으며 유하주를 음미하면서 청량감을 느끼고 여름을 녹였을 것 같다. ​ 1940년 가헌박계성은 화악산을 유람하고서 유화악산록(遊華岳山錄)에 옥정동산수정(玉井洞山水亭)이란 시를 남겼다. 萬玉臺空玉井騰(만옥대공옥정등) 前人亭事後誰能(전인정사후수능) 千年奇絶傳名地(천년기절전명지) 三老登臨有髮僧(삼로등림유발승) 多激淸流還自亂(다격청류환자란) 久磨叢石亦無憎(구마총석역무증) 入山謝却塵間務(입산사각진간무) 白鹿蒼松是我朋(백록창송시아붕) ​ 만옥대 비어있고 옥정암 날아오를 듯 옛사람 산수정 시회 누가 뒤 이을지 천년의 멋진 아름다움 이름난 곳이라 알려져 세 늙은이 오르니 머리 기른 스님이구나, 세찬여울 맑게 흘러 절로 뒤섞여, 오래 깎인 많은 돌 미움마져 사라져 산에 들어 문득티끌세상 잊고 흰 사슴과 푸른 솔이 내 벗 일세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옥정동(玉井洞) 유하담에서 옥정동(玉井洞)이라 새겨진 바위에 오르는 길은 상당히 험하다. 요즘은 새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그리 험하지 않지만 필자가 처음 이곳을 탐방하고 길을 만들 때까지는 상당히 험한 길을 따랐다. ​ 옥정동이라는 글자는 이끼에 덮여져 전혀 글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암벽화가 있을까 하고 찾아서 이끼를 덜어내는 순간 희미하게 글자가 보였는데 모두 벗겨 보니까 옥정동(玉井洞)이란 글과 정미중(鄭美中)이 이대방(李大邦)에게 써주었다는 간기까지 있는 것이다. 정미중은 청도군수를 지냈는데 이 글을 써줄 때 경상도 도사(都司)로 왔을 때 이글을 써주고 다음 해에 청도군수로 왔다고 한다. ​ 이 옥정(玉井)이란 뜻은 한퇴지(韓退之)의 시에 太華峯頭玉井蓮(태화봉두옥정련) 開花十丈藕如船(개화십장우여선) ​ 태화산봉우리 옥정의 연꽃 핀 꽃잎 열 평 남짓 연잎은 배와 같도다. 라고 하였으니 중국 태화산(太華山)의 옥정을 빌려와 청도의 화악산으로 옮겨놓고 옥정암이라 부르고 옥정암(玉井巖)이라 새겨놓은 것일까?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일감당(一鑑塘) 옥정돌이라는 글 바로 아래에는 일감당(一鑑塘)이라는 글이 눈에 띈다. 일감당은 하나의 거울 같은 못이란 말이다. 자그마한 크기의 맑고도 잔잔하여 거울같이 사물을 비춘다는 못이란 뜻을 간직하고 있다. ​ 이 일감(一鑑)이란 말은 주자의 관서유감에서 일감이란 말을 따 왔다고 한다. ​ 半畝方塘一感開(반무방당일감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 반이랑 네모난 못 거울처럼 열려 하늘빛 구름그림자 함께 떠도네. 어찌 저토록 맑을 수 있을까? 졸졸 흐르는 샘물 때문이라네. 일감당은 동그란 발우(鉢盂)와 같이 생긴 작은 웅덩이다. 이 웅덩이 서쪽 바위에 일감당이라 새겨놓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지나쳐왔는데 하석하 씨가 화양읍장 당시에 사진에 취미를 가지고 이곳을 찾아 왔다가 글씨가 있는 것을 보고는 당시 향토사학회장이었던 필자에게 알려주어 한걸음에 달려가서 세상에 알려진 글이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용항(龍吭) 일감당을 발아래 두고 이 계곡에서 가장 좁은 목에 무언가 없는가 하고 살펴보던 중에 희뿌연 물이끼가 말라붙은 바위 면에 용항(龍吭)이라 행초서(行草書)로 쓰인 글을 발견하였다. 처음엔 무슨 글인지 알 수 없어 글을 찬찬히 읽어 보니 용항(龍吭)이라 새겼다. 용항(龍吭)즉 용의 목구멍이란다. 이 계곡에서 가장 좁은 곳을 용의 목구멍으로 상징했으니 가히 이 산(山) 이 계곡(溪谷)을 신선(神仙)이 산다는 중국의 화산(華山)을상징했는가 싶다. ​ 여름철 가뭄에 비오기를 빌며 제사를 올렸던 기우단(祈雨壇)이 바로 곁에 있었으니 용과 비의 불가분의 관련이 있으니 비를 빌던 사람들의 지극한 정성에 감응(感應)으로 화답하였을 것이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낙안봉(落雁峯) 예전에 이 고을 사람들이 풀 짐을 지고 나뭇짐을 지고 드나들 때 잠시 쉬면서 갈증(渴症)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옹달샘을 막고 있는 바위에다 낙안봉이라고 커다랗게 글을 새겼으나 자세히 보지 않으면 글자를 확인하기 어렵다. ​ 왜정시대에 청도군수를 지낸 소진우(蘇鎭禹)가 쓴 ‘화산정기(華山亭記)에 낙안 말이 보이고 소강 최익주(崔翼周)의 시에도 낙안이란 시어가 보인다.’라고 한다. ​ “낙안유선갱속연(落雁遊仙更續緣) 낙안봉에 놀던 신선 언제 다시 인연을 맺을런지?” ​ 남산골 정비를 한답시고 평탄작업을 하면서 옹달샘도 메우고 이 자리에 의자를 놓았으니 옛 정취를 알고 작업을 시킨 것인지 모르고 일을 시킨 것인지 알 수가 없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금사계(金沙界) 금사계란 신선이 있는 곳과 경계를 짓는 글은 아닌가? 싶다. 이 금사라는 말은 당나라 시인이며 초서(草書)를 잘썼다고 하는 하지장(賀知章)의 녹담(綠潭)이라는 시에 푸른 못에 금사(金沙)라는 시어가 나오는데 그 시(詩)는 ​ 素影沈沈對蝶飛(소영침침대접비) 金沙礫礫窺魚泳(금사력력규어영) ​ 흰 그림자 은은하여 춤추는 나비 마주하고 금빛모래 자잘하여 헤엄치는 물고기 엿보네. ​ 라 하였으니 보통사람은 아니고 선계(仙界)와 속계(俗界)를 분별하는 글이 아닐까 한다. 금사계(金沙界)라는 글은 칠성과 관련이 있다. 인터넷의 백과사전에는 구야니주의 세계. 관세음보살의 주거처지라고 간략하게 문화콘텐츠 용어사전에 있다고 소개하고 있다. 금사계(金沙界)라는 말은 석문의범(釋門儀範) 칠성각청(七星各請)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져 있다. ​ 남무일심봉청(南無一心奉請) 북두제일자손만덕(北斗第一子孫萬德) 양명탐랑태성군(陽明貪狼太星君) 시(是) 동방최승세계(東方最勝世界) 운의통증여래불(運意通證如來佛) 유원승불신력(惟願承佛神力) 강림도장수차공양(降臨道場受此供養) 광류최승금사계(光流最勝金沙界) 호왈자손만덕군(號曰子孫萬德君) 진거북두승침지(鎭居北斗昇沈地) 총시중생작복전(摠是衆生作福田) ​ 이라했으니 북두칠성(北斗七星)중에 제일 탐랑태성군을 청(請)하는 글로서 금사계라는 말을 이었으니 필시 칠성 즉 신선을 뜻하는 글들이라고 해석해야 옳다고 생각된다. ​ 인터넷을 뒤지는 사람들은 청도남산계곡에 대해서 안내문을 보고 온통 전신만신에 퍼다 날라 이제는 금사계(金沙界)는 관세음보살의 거주지(居住地) 라는 것이 사실화 된 것에 대해서 부끄럽고 슬픔을 감출 수가 없다. 부끄럽다는 것은 진작 이 글을 찾아내지 못 한 것에 대한 수치이고 슬픔이란 이 글이 부단하게 퍼다 나르는 것을 막아내지 못 한 것에 대한 슬픔이다.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자시유인불상래 (自是遊人不上來) 이 글은 초서로 내 갈긴 모습이다. 바위가 나뉘어진 곳에 새겨진 글을 동행한 김태호 선생이 발견하여 알려진 글이다. 이글을 처음 발견하였을 때는 온통 바위에 이끼가 돋아있어 글의 내용도 형태도 알 수 없었다. ​ 나뭇가지를 꺾어서 벗겨보고 나서야 초서로 새겨진 글인 줄 알았는데 형태만 밝혀놓고 뒷날을 기약했다. 군청에 새로 발견한 글을 보고 했더니 역시 남산계곡 정비공사를 하면서 안내판에는 ​ “여기서부터 놀러 오는 사람은 오지 말라는 경계의 글이다.” ​ 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예전에 유람객들이 신둔사의 경내에 놀러와서 소란스럽게 하여 스님들의 수행에 방해를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문구로서 경계를 하였다.’라고 안내판에는 적고 있다. ​ 금사계를 신둔사와 관련지어서 설명한 오류와 함께 불교와 무관한 안내판의 설명은 누구에게 번역을 의뢰하였는지 몰라도 청도에 사는 사람이 번역한 것은 아닐 것이다. ​ 청도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 부끄럽기 그지없다. 아마도 청도군청의 담당자가 친한 사람에게 부탁을 한 모양인데 글의 내용을 잘 모르면 향토사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논의해서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 이 자시유인불상래는 ​ “이 위에도 아름다운 경치가 없다고 말하지 말라.” ​ 는 뜻이라고 조용일 씨는 말한다. 다시 이 글을 찾기 위해서 올라갔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다니다 새로 발견한 글이 모선동(慕仙洞)이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모선동(慕仙洞) 신선을 사모한다는 뜻이 되기도 하지만 신선이 사는 골짜기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모선동(慕仙洞)이라 새겨진 바위 외에는 다른 글을 새겨놓은 것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 어느 날 모선동(慕仙洞)이라는 글을 새로 찾았다는 것을 당시 문화재를 담당했던 군청관계자에게 얘기했더니 혼자서 찾아 나섰다가 봉림대(鳳臨臺)라는 바위를 찾았다.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봉림대(鳳臨臺) 당시까지 보이지 않았던 글씨인데 그해 여름에 큰 장마에 위에서 굴러내려 온 것이 분명하다. 바위는 아주 크지는 않았는데 굴러와서 모가 다 죽어 둥글어 보였다. 이 바위도 언제 또 큰물이 질 때 어디로 굴러갈지 한쪽으로 올려놓았으면 좋으련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 여기까지가 화산동문(華山洞門)에 새겨진 글과 글에 얽힌 이야기들은 오로지 신선사상(神仙思想)이 가득한 도교(道敎)와 관련된 이야기 들이다. ​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이 산 계곡 곳곳이 신선과 연관된 글들이 새겨져 있다. 처음 나타난 음용지는 신선사상에서 나오는 용이다. 그리고 백석뢰를 비롯해서 취암과 질양석, 운금천, 만옥대, 철주단과 유하담, 옥정동 그리고 일감당, 용항 마지막에 금사계 등은 완전한 신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며 끝으로 자시유인불상래와 봉림대 모선동을 끝으로 신선과 관련된 즉 도교의 내용들로 점철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상북도 청도군 남산[南山] 골[谷] - 2편

경상북도 청도군 남산[南山] 골[谷] - 2편

경상북도 청도군 남산[南山] 골[谷] - 2편 박 윤 제 Park Youn jae · 청도 문화원장 ·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 ·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 "지난호에 이어 도광23년에 새겨진 화산동문(華山洞門)에서부터 모선동(慕仙洞)까지 굽이 굽이 마다에 새겨진 글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박윤제 청도문화원장으로부터 들어보자." 화악산(華嶽山)과 옥정동(玉井洞) 음용지(飮龍池)를 뒤로 하고 위쪽으로 조금 올라가보면 속칭 “국시웅덩이”가 나타난다. 국시웅덩이는 바위가 수많은 세월 동안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돌에 닳고 닳아 마치 국수 가락처럼 골이 깊게 패여서 물줄기가 국수 모양으로 흐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그 앞에 웅덩이가 하나 있다. ​ 1960~70년대까지만 하여도 여름밤이면 마을의 젊은 아낙네들과 처녀들이 이곳에서 목욕을 하였다. 낮에는 남정네들이 땀을 식혔고 밤이면 아낙네들이 이곳에서 더위를 물렸는데 산의 오른쪽에는 신둔사(薪芚寺)에서 홍도 골로 넘어가는 “바램이 길”이 있다. 가파르기가 엄청날 뿐만 아니라 암석으로 된 곳에서 총각들이 선녀들의 목욕하는 모습을 훔쳐보기 위해서 숨어 있다가 미끄러지곤 했다는 곳이다. “국시웅덩이”를 뒤로 하고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백석뢰(白石瀨)”라고 새겨진 바위를 만난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 백석뢰(白石瀨) 백석뢰라고 새겨진 이 바위는 약 4m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는 위에 있는 바위에 붙어있었을 것이나 석질(石質)이 청석이라 빗물이 스며들고 나무뿌리가 파고들어 바위틈이 갈라져 떨어진체 비스듬히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돌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고 엎드려 있기 때문에 안내자가 없으면 찾기 어렵다. ​ 이 백석뢰(白石瀨)라는 말은 원래 물밑의 흰 자갈이 보석처럼 반짝인다는 여울을 말한다고 한다. 이 말은 중국의 명산승개기(名山勝槪記)에 백석애(白石崖)라는 글이 실려 있다고 하는데 ​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에 숨겨져 나를 듯한 폭포, 여름철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시원하고 서늘함을 느끼게 하니 진실로 세상 밖의 아름다운 경치로다. (層巖削碧 幽藤飛 瀑 夏月過此 淸凉 逼人 眞物外佳境也)” 라는 글귀가 있다고 한다.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 봉화취암(奉和醉巖) 취암(醉巖)보다 아래에 있는 바위이다. 이 바위는 언제 큰물이 질 때 굴러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 굴러온 바위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봉화취암이라는 말은 취암에 대한 받든다는 뜻이 스며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취암 일취정의 아들 우엽(宇曄)이 아버지의 시를 받들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 醉流千百曲(취류천백곡) 林鳥兩三聲(임조양삼성) 盡日遲遲坐(진일지지좌) 巖高感慕情(암고감모정) ​ 취암 아래 흐르는 백 천 구비 물결 숲엔 새소리 어우러졌네 온종일 늦게까지 앉아 있노라니 바위에 새겨진 뜻 더 깊게 사무칩니다. ​ 라고 새겼고 그 아래에도 손자 종진(鍾震)이 ​ 前賢遊咏地(전현유영지) 山水盡風聲(산수진풍성) 醉石留眞面(취석유진면) 摩巖感舊情(마암감구정) ​ 옛 분들 시 읊으며 노닐던 자리 산과 물 바람소리 어우러졌네 취암의 참모습 그대로 남아 어루만진 바위엔 옛 정 느껴지네 ​ 라는 글을 새겨놓았다. ​ 이 봉화취암을 두고 계곡을 오르면 마치 바위 위에 비단물결이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모습을 두고 운금천(雲錦川)이라 한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운금천(雲錦川) 운금천이란 적석(磧石)을 차곡차곡 쌓으면서 내려온 듯, 한 돌 위로 물이 찬찬히 미끄러지듯 내려오는 모습을 한낮에 보면 아름다운 비단이 바람에 나부끼는듯한 이곳은 옛 풍류를 즐기던 시인들이 이곳에서 한나절 흐르는 물에 발 담그고 청량감을 느끼면서 하루 종일 시를 읊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 옛 어른들의 말씀을 들어보면 옛날에 부잣집 중늙은이들이 아침나절에 하인에게 먹을 것을 지우고 기생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하루를 즐겼다고 하니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지금의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멋스러움이 담긴 곳이라 할 수 있다. ​ 이들이 은근히 술에 취해 글을 짓고 뒷날 석수(石手)에게 부탁하여 바위에 새겨진 것이 취암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 취암(醉巖) 취암이라고 새겨진 바위에는 작자(作者)의 이름과 년도를 각자(刻字) 해놓았으니 바로 일취(一醉) 도필락(都必洛) 이라는 분이다. ​ 一醉 都必洛 (일취 도필락) 醉臥溪邊石(취와계변석) 夢中廳水聲(몽중청수성) 亂沫浮花去(난말부화거) 升沈亦世情(승침역세정) ​ 취하여 시냇가 돌에 누워 꿈결에 물소리 듣노라 휘날리는 물보라 꽃잎이 떠가니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도 세상의 정일세 ​ 이곳에 새겨진 글들은 년대(年代)가 각자(刻字)되어있기 때문에 언제 누구의 소행(所行)인지 알 수 있다. ​ ​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질양석(叱羊石) 취암에서 고개를 왼편으로 돌려 보면 너덜겅이 있고 너덜겅 왼편 끝 부분에 질양석이라 새겨진 바위를 볼 수가 있다. ​ 질양석이란 말은 중국 도교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이야기인데 신선전(神仙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 신선전(神仙傳) 갈홍편에는 "황초평(黃草坪)이 어릴 때 양을 키우고 있었는데 어떤 도사가 그의 착함을 보고 금화산(金華山) 으로 데려갔다. 양을 치러간 동생이 40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자 그의 형 황초기(黃草起)가 동생을 찾아 백방으로 다녔으나 동생을 찾을 수가 없어 하루는 시장(市場)에서 점(占)을 치러갔는데 점치는 사람이 말하기를 금화산(金華山)에 있는 도사(道士)를 찾아가서 물어보라고 하였다. ​ 그는 금화산에 있는 도사에게 동생에 대해서 물었더니 금화산에서 양을 치는 아이가 성은 황(黃)이요 이름은 초평 (草平)이라고 하는데, 하며 초기를 데리고 금화산으로 들어갔다. 초기(草起)가 도사를 따라가 초평을 만났다. ​ 초기가 동생의 안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첫마디가 “양은 어찌하였나”하고 물었던 “산 동쪽에 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형 초기가 보니 모두 흰 돌만 있고 양은 보이지 않았다. 형이 다시 물었다. “양은 모두 어디에 있느냐?” 초평이 말했다. “양은 여기 있습니다.” 하면서 우~어~워 하고 소리치니 흰 돌들이 모두 양으로 변하여 일어나니 수 만 마리의 양떼가 되었다. (叱叱羊起於是白石皆起成羊 數萬頭)" ​ 는 일화가 있다. 이 글이 새겨진 바위 앞에는 너덜겅으로 수많은 돌들을 중국의 고사에 비유하여 만든 것이리라 생각된다. 사진: 청도 문화원장 박윤제 만옥대(萬玉臺) 만옥대는 질양석에서 좀 더 올라가면 세로로 새겨져 있다. 글이 새겨진 바위 앞에는 길게 계곡을 막을 듯이 길게 내민 곳에 3단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있다. 높이는 그리 높지 않지만 3단으로 내리 쏟아지는 물은 수량(水量)이 많을 때는 가관(可觀)이다. 만옥대란 수량이 많을 때 폭포에 떨어지는 수 만개의 물방울이 가히 하늘에서 옥구슬이 떨어지는 모습을 연상하게 한다. ​ 이곳에는 서상동 떠꺼머리 총각과 동천동 과부의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던 이야기가 전해져 오기도 한다. 만옥대에서 옆으로 비스듬히 오르면 안내판에는 연주단(聯珠湍)이라 적혀있으며 지명유래지에는 철주단(徹珠湍)이라 하였다. 연주단이란 구슬을 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철주단은 구슬을 꿰었다고 할 수 있으니 아마도 철주단이 맞을 것 같다. 철주단(徹珠湍)이나 연주단(聯珠湍)이란 말은 글자를 제대로 판독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워낙에 초서로 휘저어 놓은 것 같은 모습이어서 연(聯)자 인지 철(徹)자인지 확연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주단(徹珠湍)으로 읽고 넘어가자 철주단은 개울을 건너야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안내판이 있어서 저것이구나 하고 건너가는 수고로움은 취하지 않는 것이 현대 사람들의 취향(趣向)이라고 할 수 있다. 철주단을 보고는 돌아서면 석문이라고 새겨진 바위를 볼 수 있다. ​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 ​

경상북도 청도군 - 남산골 1편

경상북도 청도군 남산[南山] 골[谷] - 1편

경상북도 청도군 남산[南山] 골[谷] - 1편 박윤제Park Youn Jae - 청도 향토문화원장 - 국사편찬위원회 지역사료조사위원 - 경상북도 문화재 전문위원 "도광 23년에 새겨진 화산동문(華山洞門)에서부터 모선동(慕仙洞)까지 굽이굽이 마다에 새겨진 글과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박윤제 청도 향토 문화 원장으로부터 들어보자. 사진 공공디자인저널 편집부 "경상북도 청도군!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발원지로 유명한 청도군 화양읍에는 몇 해 전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촌중심지 활성화사업 선도지구 중심지사업의 총괄 계획가로 활동하며 연[緣]을 맺었다. 농촌에 거주하는 모든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동시에 농촌마을이 지속적으로 고령화, 과소화되고 있는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종합적인 정책의 요구에 따른 농촌중심지활성화 사업으로 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훗날 본지의 지면을 통해 자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사진 공공디자인저널 편집부 조선시대에 세워진 청도읍성이 위치한 화양읍은 청도의 중심지였지만 1905년 청도역 건설과 고수로길, 청화로의 개통에 따라 중심지가 청도읍으로 이동하여 화양읍 인접 지역인 청도읍이 중심생활권으로 변모됨에 따라 화양읍은 농촌중심지의 기초서비스 기능이 위축됨으로써 정주환경 노후화 및 문화•복지 등 생활서비스 등이 전무한 농촌이 되어 있었다. 화양읍은 중심지 내 청도 석빙고(보물 제323호), 청도읍성(경북기념물제103호), 청도향교(경북문화재 제207호), 도주관(경북문화재 제212호), 청도척화비(경북문화재자료 제109호) 등 농촌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많은 유형문화재가 있다. 사진 청도 향토문화원장 박윤제 문화재의 밀집과 청도읍성 관광자원화사업의 추진으로 많은 방문객이 찾고 있어 이와 연계하여 화양읍의 거점기능을 강화하며 주변 배후마을 주민들과 함께 공동체적 삶을 영위하고 정주만족도를 향상시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야하는 실로 중요한 사업이다. 이 곳에서 같은 PM단의 위원인 박원재 청도 향토문화 원장으로부터 놀랍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로부터 남산골 이야기를 들어보자. 화악산(華嶽山)과 옥정동(玉井洞) 청도의 옛 근거지(根據地)는 화양(華陽)이다. 화양이라는 지명은 1914년 행정구역 변경 때 생긴 것이니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원래 청도군청의 소재지였던 이름은 상읍내면(上邑內面)이었으니 청도군청이 소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읍면이라 했다. 화악산 동 북쪽에 계곡을 일러 남산골이라 이름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이곳을 옛 어른들은 화산동문(華山洞門)이라 이름하고 도교에 심취한 사람들이 모여 시계(詩契)를 만들고 바위에 새겨둔 것이 지금은 명소가 되었다. 도광 23년에 새겨진 화산동문(華山洞門)에서부터 모선동(慕仙洞)까지 굽이굽이 마다에 새겨진 글과 그곳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자. 원래 이곳에 노닐며 글을 새긴 어른들의 뜻과는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것이 처음 이곳에 노닐면서 생각한 것과 뒷날 이곳에 글을 보고 옛 생각을 따른다는 것은 전혀 다르게 해석될 수도 없지 않을 것이다. 옛날에 기록한 여지도서(輿地圖書)와 청구도(靑丘圖), 청도군지(淸道郡誌), 청도읍지(淸道邑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에는 현대 지도 상에 남산이라 표기된 곳은 분명하게 화악산(華嶽山)과 오산(鼇山)이라했다. 화악산을 두고 동서남북을 살펴보면 동쪽은 낙대폭포가 있는 곳이고 북쪽은 각남면 칠성리로 내려가는 길이 되고 남쪽은 밀양의 둔덕산(屯德山)이요, 현재 지도상으로 화악산으로 표기된 곳이다. 화악산을 두고 동서남북을 살펴보면 동쪽은 낙대폭포가 있는 곳이고 북쪽은 각남면 칠성리로 내려가는 길이 되고 남쪽은 밀양의 둔덕산(屯德山)이요, 현재 지도상으로 화악산으로 표기된 곳이다. 아무튼 우리청도의 사찬읍지로 가장 오래된 오산지(鰲山誌)의 기록에는 “屯德之一支過一峽北指爲華嶽山爲郡地主山則名之曰鰲山也”라 했으니 현재 남산(南山)이라고 표기된 곳은 옛 지명은 화악산이 되고 화악산은 바로 우리 군(郡)의 주산(主山)이다. 이 화악산에는 고찰(古刹)이 3곳이 있으니 적천사(磧川寺)와 신둔사(薪芚寺), 그리고 죽림사(竹林寺)가 있다. 사진 청도 향토문화원장 박윤제 동북쪽에 흐르는 계곡은 화양읍 교촌리와 동천리를 나누는 계곡으로 화악산(華嶽山) 동북록(東北麓)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교촌동에서 산곡(山谷)으로 오르는 계곡입구에 화산동문(華山洞門)이라고 새긴 바위가 있다. 화산동문(華山洞門)이라 새겨진 바위는 계곡입구에 길에서 보면 약간 높은 곳에 있는 큰 바위에 새겨져 있다. 이 글은 동상동(東上洞)에 거주하는 오정호씨가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진 글이다. 처음에는 무슨 글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계곡에 새겨진 글들을 생각해 보면서 화산동문(華山洞門)이라 읽은 것이다. 화산동(華山洞)즉 화악(華岳)에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이다. 중국 서안에 있는 화산은 도교의 신앙지이다. 우리 화산동을 도교에 심취한 선인(先人)들이 신선(神仙)을 사모(思慕)하고 신선이 노닐던 장소를 지칭(指稱)하여 이름을 붙였으니 그 말들을 생각하면서 탐방(探訪)을 하면 더 재미있고 아름답게 느껴질 것이다. 제일 먼저 음용지(飮龍池)를 만난다. 이곳은 예전에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한자로 “음용지(飮龍池)”라고 바위에 새겨놓았다. 계곡에서 약 4~5m 위쪽에 얹혀 있는 바위인데 모양은 둥근 달걀 비슷하게 생긴 바위로 옛날에 큰 홍수 때 굴러내려 온돌인 듯 모가 모두 죽은 둥글둥글한 바위이다. 그 바위에 보일 듯 말 듯 새겨진 한자 속에 옛날 가뭄이 심하면 고을 원님께서 육방관 속을 거느리고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곳을 표기하였으니 용이 물을 마시는 곳이라는 뜻을 담았던 것 같다. 음용지는 목마른 용이 물을 마시는 형국은 갈용음수(渴龍飮水)에서 따왔는지 아니면 용이 목마르듯 물을 갈구한다는 뜻에서 따 왔는지는 알수 없다. 이 계곡의 이름을 용지골이라고 한 것은 음용지(飮龍池)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청도뿐만 아니고 우리나라에는 용과 관련된 전설과 지명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산천숭배사상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용은 인충(鱗蟲)의 우두머리라고 해서 상상의 동물이고 또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 수 있는 신령스러운 동물로도 알려져 있는데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모두 모았으니 머리는 낙타의 모습을 하고 있고 뿔은 사슴의 뿔을 가졌으며 눈은 토끼의 눈이요. 귀는 소의 귀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 청도향토문화원장 박윤제 목덜미를 살펴보면 뱀의 모양과 같고 배는 큰 조개의 모습을 닮았고 비늘은 잉어의 비늘을 빼다 박았다. 용에게는 발이 달려있는데 그 발톱은 매의 발톱을 하고 있으며 발바닥은 호랑이 발바닥과 닮았다고 하는데 그 중에 9×9의 숫자인 81개의 비늘이 있고 그 소리는 구리 쟁반을 울리는 소리와 같고 입 주위에는 긴 수염이 있으며 턱 밑에는 구슬이 있는데 여의주라고 한다. 목 아래 거꾸로 박힌 비늘을 역린(逆鱗)이라고 하며 자유자재로 숨거나 나타나기도 하며 가늘어지거나 굵어지고 커지고 작아지며 춘분이면 하늘에 오르고 추분이면 못 속으로 잠긴다고 한다. (能幽能明 能細能巨 能短能長 春分而登天 秋分而潛淵 : 說文에서) 또 용(龍)에게 아홉 아들이 있는데 각기 모양도 성품도 다르다고 하다. 이 이야기는 젊은 부부에게 특출난 아들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덕담으로 하는 말이다. “용생구자부동명(龍生九子不同名)” 용의 자식이면 당연히 용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용의 아들이 아홉 인데 이름은 같지 않다는 말을 한다. 예로부터 용은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 건물이나 물건에 장식해 왔다. 자세히 보면 장식한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모양이 확연하게 다른 것을 볼 수가 있다. 흡사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좋아하는 시기와 닮았다고 생각하는데 한번 음미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다음의 이야기는 중국 명나라 때 호승지라는 사람이 지은 진주선(眞珠船)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는 비희(贔屭)이다 이 비희는 무거운 것을 들기를 좋아한다고 하며 비석의 받침으로 사용되는 거북이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이름으로는 패하(覇下)라고도 부른다. 엄마가 시장을 보아 갖다놓으면 아이는 이곳저곳으로 옮겨 놓을 때 한창 힘이 생겨간다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두 번째는 이문(螭吻)이다 이문은 높은 곳에서 먼 곳으로 내다보기를 좋아하므로 건물의 지붕에 올려놓는다. 기와지붕에 있는 망와(望瓦)와 같은 뜻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괜스레 높은 곳에서 밖을 내다보기를 좋아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때가 아마도 이문의 시기(時期)가 아닌가 한다. 세 번째는 포뢰(浦牢)이다 포뢰는 소리 지르고 울기를 좋아하므로 종(鍾)뉴에 새긴다. 포뢰는 고래를 보면 놀라서 운다고 하여 종을 치는 망치를 고래의 모습으로 하여 종을 치면 종은 크게 멀리 울려 퍼진다고 한다. 어린 아이 때는 어른의 눈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떼쓰고 울고 하는데 이때가 아마도 포뢰의 시기가 아닌가 생각해 볼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는 범을 닮은 폐안이다 공공심이 강하고 정의롭고 주위를 살펴보면서 위엄을 차린다고 믿어 관아의 법정에 세우거나 옥(獄)의 문위에 장식했는데 폐안(狴犴)이란 이름도 ‘감옥을 지키는 들개’라는 뜻이라고 한다. 다섯 번째는 도철(饕餮)이다 본래 사흉(四凶)이라 하던 중국 고대의 4마리 악수(惡獸)중 하나로 사람의 머리에 뿔이 있으며 양의 몸을 가지고 온몸은 털로 뒤덮여 있고 호랑이처럼 송곳니를 가진 괴물이다. 도철은 엄청난 식욕으로 무엇이든 먹어치우면서 자기는 일하지 않고 다른 이의 소유물을 빼앗는다. 강자에게는 굽실거리며 약한자를 괴롭히는 성격이었던 도철은 순(舜)임금에 의해 추방되었다. 용의 아들이나 먹고 마시는 것을 탐하는 본래의 성질은 변하지 않아 솥뚜껑이나 제기(祭器)에 조각해 놓는다. 여섯 번째는 공복(蚣蝮)또는 범공(帆蚣)이라고도 불리는 공하(蚣蝦)는 용의 여섯 번째 아들이다. 사찰 입구, 특히 송광사 입구 다리에 매달린 듯 조각되어 있는 이 물건은 바로 공하이다. 물길을 따라 들어오는 잡귀를 막아달라는 염원을 담아 새겨놓은 것이다. 만 원짜리에도 보이는 측우기의 둘레를 장식한 용의 모습도 이 공하라고 한다. 일곱 번째는 애자(睚眦)다. 천성이 강직하고 외골수이며 다투기를 좋아한다. 흘겨보는 눈초리를 뜻하며 죽이기를 좋아하는 정의의 사자이다. 이순신 장군의 칼에 새겨진 용이 바로 애자이다. 곳에 따라서는 칼이나 창의 자루에 조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여덞 번째 산예는 그 모습이 사자를 닮았다고 하며 이름글자에 산(狻)은 사자를 뜻한다. 사찰 입구에 문수보살이 타고 있는 사자가 이 산예이며 또한 연기를 좋아하고 태우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바로 석탑을 지키거나 부처님의 좌대에 새겨진 것은 금예(金猊)라고 한다. 마지막 아홉 번째는 초도(椒圖)인데 모습은 소라를 닮았다고 한다. 용의 마지막 아홉 번째 아들이며 성격도 막혀있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하여 대문이나 궤짝에 문고리를 물고 있는 짐 승이 바로 이 초도(椒圖)이다. 이 용생구자설은 어디까지나 이야기이다. 순서를 다르게도 하고 또 이름을 다르게도 한다. 명나라 이동양(李東陽)이 지은 『회록당집(懷麓堂集)』에는 수우(囚牛)애자(睚眦)•조풍(嘲風)•포뢰(浦牢)•산예(狻猊)•비희(贔屭)•폐안(狴犴)•부희(負屓)•이문(螭吻) 이라고 쓰여 있다고 한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서계동이 어디야?

서울 속 알 듯 모를 듯 한 그동네, 서계동

"서계동이 어디야?" 이지미 Lee Ji-mi · PUBLIC DESIGN JOURNAL 전문위원(본지) · (주)티씨아츠 대표 ·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도시재생사업 총괄코디네이터/도시재생센터장 · 동두천 두드림 디자인 아트 빌리지 본부장 · 대전광역시 청인지역조성 아트디렉터 · 서울교통공사 지하철테마역사조성 총괄디렉터 "서계동에 있습니다. 서울역 뒤 서부역은 아시지요? 서부역에서 대각선으로 맞은편에 있는 빨간색 국립극장 바로 뒤편입니다." 누군가 내게 회사 위치를 물어오면 하는 대답이다. 이렇게 대답하면 대게 “아~”한다. 아는 듯 모르겠다는 뜻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지금까지도 사람들에게 서계동은 여전히 알겠는데 모르겠는 동네로 남아있다. 2014년 이후 도로명 주소 사용으로 ‘서계동’이라는 이름은 주소에서조차도 괄호 속에 들어가는 명칭이 되었다. 서계동은 지형적으로는 “서고동저”,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은 지형에 북쪽으로는 만리동, 서쪽으로 청파동과 맞닿아 있고 동쪽으로는 중림동과 봉래동, 남쪽으로는 아주 오래전 복개되어 표지석만 남아있는 만초천으로 둘러싸인 약 5만여 평에 이르는 소쿠리모양의 평지에 형성된 동네이다. 이런 위치적 특성으로 인해 서계동은 지금도 그리고 아주 오래 전 내가 살았던 1980년대조차도 “서계동”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동네였다. 서계동을 설명하려면 서울역과 청파동, 만리동을 먼저 설명해야 했다. 서울역은 그 이름만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고 청파동은 숙명여대와 효창동으로 이어져 큰 규모의 단독주택들이 있는 부자 동네였다. 반면 만리동은 연화봉 산등성이에 자리 잡은 만리시장을 중심으로 한 가난한 산동네였다. 서울역 뒤편, 부자동네 청파동 옆, 가난한 동네 만리동 아래, 서계동을 설명하자면 이렇게 행정 구역상으로는 청파동을 동원해야 하고 동네의 정체성을 설명하려면 만리동을 동원해야 했다. 과거 현대칼라가 있던 곳 사진: 공공디자인저널 편집부 청파동과 만리동이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동네였다면 서계동은 서울역과 남대문 안 도심으로 이어지는 평지의 출발점에 위치한 탓에 주거지역이라기 보다는 서울역을 배후에 두고 제화, 인쇄, 금형 등의 제조업 공장이 다수 위치한 공업지대로 발전해왔다. 지금은 없어진 진일철공소, 만리양초, 현대칼라 등의 크고 작은 제조업 공장들과 세광음악출판사 같은 유서 깊은 음악출판사, 코레일유통공사 등등과 여러 종류의 지역신문사들이 터를 잡고 있었다. 서계동에 위치한 국립극단 거기에 인근 남대문시장과 중림동의 수산물 시장으로 납품하는 식품관련 공장들이 여럿 있었다. 또 서울역 방향 염천교 일대에는 제화공장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그런 탓에 내 기억 속 서계동은 가난한 거주지라기보다는 도심에 자리 잡은 소규모 제조업 공장 지대로 남아 있다. 먼 기억으로 남은 오래전의 서계동을 입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계기는 2016년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발행한 자료조사집 <청파·서계>를 통해서였다. <청파·서계>에 따르면 청파동과 서계동은 고려시대 이후 “역촌驛村”으로 발전했다. 역사적으로 역촌이었던 관계로 서계동은 인근 서울역의 흥망성쇠를 함께 겪게 된다. 해방 이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서울역이 물류의 중심으로 역할 하는 동안 서계동은 그 배후지로 기능하며최대 번성기를 보낸다. 그러나 1968년 전차 운행이 중단되고 연이어 개통된 서울역고가와 경부고속도로로 인해 서울역은 물류의 중심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2010년 서계동의 전면부를 차지하고 있던 기무사 수송부대가 철수하여 국립극단이 자리 잡기까지 서계동은 40여년간 베일에 싸인 채 도심내 낙후 지역으로 남게 된다. 서계동이 사람들에게 다시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은 2004년 KTX고속전철이 개통되어 서울역이 예전의 위상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중림동과 봉래동을 중심으로 재개발 사업이 본격화되던 때이다. 개발이 예상되는 땅을 향한 사람들의 관심은 매우 이기적이고 잔인한 것이어서 그 무렵부터 서계동에 살고 있던 오래된 원주민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땅은 개발이익을 위해 잘게 쪼개진다. 거기에 이웃지역의 재개발로 그곳을 떠나야했던 작은 봉제공장들이 서계동에 자리 잡기 시작한다. 2015년 1월 서 울 시 는 만리동과 남대문 시장을 잇는 서울역고가 재생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는 <서울역 7017프로젝트>실행을 발표한다. 서울역 일대의 보행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남대문시장을 활성화시키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같은 해 5월에는 <서울역 일대 종합 발전계획>이 발표된다. 이 두 사업으로 서계동을 중심으로 한 서울역 일대 공간에는 천지개벽 수준의 변화가 예고되고 있다. 반면 서계동은 도시재생지구로 확정됨에 따라 오랜 동안의 침체에서 벗어나면서도 서계동 고유의 정체를 지켜낼 수 있는 마지막 시점에 서있다. 사진: 공공디자인저널 편집부 삼 백 여 개의 봉제 공장과 백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게스트하우스가 자리 잡은 현재의 서계동에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즐거운 얼굴과 불황에 시름하는 봉제공장 사람들의 그늘진 얼굴이 공존하고 있다. 주민들은 여전히 재개발을 원하는 쪽과 도시재생을 찬성하는 쪽으로 나누어져 서로 눈길을 피하곤 한다. 그 무엇이 되었든 동네를 두고 벌이게 될 갑론을박의 시간을 보내며 공간은 변하고 “서계동”이라는 이름은 아무도 쓰지 않는 명칭이 되어 사라져 갈 것이다. 사진: 공공디자인저널 편집부 이름이 사라지면 실체도 사라지게 될까? 재개발이 아닌 도시재생으로 서계동은 고유의 정체를 지켜낼 수 있을까? 서계동의 미래가 우려 담긴 기대를 갖게 한다.

제주에서 감상하는 자연, 건축, 예술 -3편

존재의 근원, 마음의 심연으로 향하는 길

거기 길고 긴 길 한쪽 거친 벽에, 갑자기 나타나는 가로로 긴 프레임이 뚫려, 그 프레임너머에 유채꽃과 제주바다와 성산의 풍광이 놀랍게 펼쳐져 있다. 그 사각의 틈사이로 바람과 빛이 소통한다. 그리고 노란색 야생화의 들을 너머 바다 위에 떠있는 성산일출봉을 조망한다. 일본전통정원의 차경기법 요소 ‘너머보기’와 ‘사이보기’ 특징을 보여주는 곳이다. 심호흡을 하게 되는 것은 필자만의 감성일까. 관광객들의 카메라가 이 장면을 담기 위해 분주하다. 동양미래대학교 건축과 이정미 교수 안도의 건축공간에서는 빈번하게 일본전통정원의 차경기법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일본전통 차경기법은 자연그대로가 아닌 자기지배 아래 길들이는 특징을 갖는다. 원경을 담장 같은 인공구조물들 사이에 두고 원경하부가 담에 의해 편집되는 ‘너머보기’, 벽이나 개구부를 통해 원경을 보는 ‘사이보기’, 상부의 매개물에 겹쳐서 보는 ‘겹쳐보기’, 내부와 원경사이에 중간영역을 차단시켜 육감을 통하여 인지하는 ‘간접보기’, 원경을 축소하여 내부로 도입한 ‘축소하기’기법들이 그것이다. 지니어스 로사이에서 이러한 기법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정사각의 균질한 구조로 이루어지는 프레임의 공간내부는 비워짐과 채워짐의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크고 작은 볼륨의 덩어리에 건축공간의 깊숙한 곳까지 외부적인 요소가 유입된다. 비워진 그리드 프레임으로는 바람과 빛이 자유롭게 소통하고 지역의 특수한 자연환경을 건물에 유입시켜 나가는 과정을 통해 건축을 육체화시키고자하는 안도의 의도를 볼 수 있다. 높은 담장의 긴 경사로를 따라 이제 실내 명상공간으로 진입이다. 진입로를 제외한 지하의 명상전시공간의 내부는 모두 노출콘크리트로 이루어진다. 자연의 빛은 사라지고 어둠 속 길 하단에 인공조명이 하나씩 길을 비춘다. 존재의 근원, 마음의 심연으로 향하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 빈 공간을 지나면 미디어아트 작가 문경원의 작품이 세 개의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먼저 ‘다이어리Diary’, 미디어아트가 빈 공간 한 벽면 가득 흐르고 있다. 제목이 일상을 적어가는 일기장이다. 다시 자연 현상을 생각하게 하는 영상이다. 나무의 생장과 소멸, 재생을 영상으로 표현한 것으로 앙상한 가지로 시작하여, 잎과 꽃이 피고, 점점 번성하다, 다시 하나씩 떨어지고, 사그라지고, 다시 피는 생명순환을 표현한 작품이다. 이것은 자연의 유한과 무한이 섞인 존재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두번째 작품은 ‘어제의 하늘’이다. 육면체 안에 원통형 공간을 레이어링한 전시공간으로 하늘풍경 영상이 원형바닥에 떠있다.사각의 대지와 원형의 하늘 공간에서 내부와 원경사이에 중간영역을 차단시켜 육감을 통해 인지하는 ‘간접보기’의 공간이다. 우주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감싸고 있는 세계. 시간의 경과를 담고 있는 하늘 위에는 풍경들이 거품처럼 떠돌고 그 원형의 영상 안에 서있는 자신이 있다. 찰나의 덧없음을 상징한다. 세번째 ‘오늘의 풍경’, 전시공간은 벽돌벽으로서, 벽면 일부가 사각프레임으로 열려 영상이 흐르는 가부좌 공간이다. 바깥 카메라를 통해 지하에서 보는 지금 이 순간의 바깥세상을 벽의 일부를 뚫어 이어준다. 성산일출봉의 일출부터 일몰까지의 실시간 풍경이 화면에 투사된다. 그 간접의 풍경을 통해 밖에서 보던 제주자연과 암흑의 공간에서 보는 현실이 대비를 이루며 초현실적인 감각에 빠져들게 한다. 원경을 축소하여 내부로 도입한 ‘축소하기’ 기법의 공간이다. 지금 이순간 존재가 어떤 것인지 되돌아 보게 한다. 그런 작품 속에서 가부좌로 있다보면, 현실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는, 우주 저 끝의 신비한 공간 속에 육체가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다. 그 감흥의 여운은 오래도록 이어져 건물 밖으로 나온 뒤에도 한동안 숙연해 지는, 내부로 침잠해 간 공간들이었다. 자연을 전시한 명상전시공간 지니어스 로사이를 뒤로하고, 인공자연이 아닌 자연 그대로를 다시 만나는 글라스하우스의 2층공간에서 자연 그대로의 확 트인 제주의 원경을 즐기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한다. 2월호에 계속됩니다. * 작가의 느낌을 여과없이 전달하기 위하여 문장 표현과 어휘선택을 다듬지 않았습니다. - 편집부

제주에서 감상하는 자연, 건축, 예술 - 2편

자연과 함께하는 명상전시공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안도 다다오의 벽체에서 ㄱ자형으로 닫친 형태는 보이지 않는다. I자형 수직재인 벽면 그리고 수평재인 I자형 지붕 처마는 벽으로부터 돌출되어 외부로, 우주로, 확장되어 부유하고 있다. 거대한 수직벽 위에 상대적으로 가벼워보이는 듯 안정감있는 처마지붕을 얹어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의 가벼움을 구현했다. 마치 우주선이 불시착한 듯, 출발할 듯, 보이기도 한다. 벽면에 출입을 위한 개구부와 외부자연으로의 확장성과 벽체를 가벼워 보이도록 또 하나의 개구부를 두었다. 저 끝쪽 개구부는 사람의 통행을 위한 곳이라기보다 자연현상의 통행로 즉, 바람길, 외부환경을 건축 내부로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우리와 무관했던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자연경관을 보는 시선을 위한 창으로써의 역할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동양미래대학교 건축과 이정미 교수 많은 가로와 점 그리고 세로들이 끊임없이 외부로 내부로 연결하며 확장한다. 매끄러운 콘크리트 앞. 레이어링된 거친 자연석의 낮은 벽이 없다면 어쩌면 이 건물은 지나치게 차갑게만 다가올 것이다. 노출콘크리트의 벽은 주위환경과의 관계에서 확연하게 드러나는 매끈한 질감과 극도로 단순한 형태의 결연한 차이로 인하여 더 강하게 부각된다. 이러한 주변맥락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방식은 그 극명한 대립 속에서 역전과 의외성이 삽입됨으로써 좀 더 풍부한 건축을 가능하게 하며, 외부환경은 건축 내부로 선택적으로 수용되어 우리와 무관했던 풍경을 새롭게 인식하게 해준다. 매끄러운 벽에 잘라낸 듯, 심플한 직사각의 입구로 들어서면 다양한 질감의 사각 면들의 향연으로 잠시 멈칫하게 된다. 연못이 있는 이 장소는 실제적 기능보다 무엇인가 다양한 느낌으로 인해 매표소이면서 또 다른 감각의 혼돈을 주는 공간이다. 안도는 차가운 추상, 기하추상의 대가인 조셉 알버스의 회화에 대한 견해를 다음과 같이 피력 했다. “알버스의 방법은 정방형 안에서 감각의 모호함을 허용하는 것이다. 정방형이란 규칙안에 자신을 한정해서 독특한 색채를 칠한다. 이때 관찰자의 감각은 작품의 미약한 진동과 확장을 느끼고, 다양한 자유를 향하고자 한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는 알버스의 방식에 색채를 대신하여 건축공간에 인공과 자연의 요소들로 채워 감각의 모호함을 허용한 것이다. 이 매표소 공간에서 알버스의 회화를 말한 안도의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진갈색 잔돌들로 이루어진 대기공간 사각바닥은 거칠다. 거기에 고인돌의 거석을 연상시키는 유기적형태의 돌의자가 있다. 바닥경계는 단호한 직선의 경계로 시작되어 마무리는 자연의 요소와 모호하게 연결된다. 매끄러운 콘크리트 질감의 면들 사이에서 태초의 자연을 느끼게 되고, 연꽃으로 채워진 연못은 더 거칠고 큰현무암들의 군집으로 경계를 이룬다. 부드러운 수면과 매끄러운 콘크리트벽과 연결되어 그 더 너머엔 모호한 경계로 태초의 자연이 이어진다. 우주의 행성으로 향해 가는 느낌이라면 좀 과장된 표현일까. 실제적 기능의 유리로 마감한 안내데스크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자연은 걸어오면 서 본 평온한 넓은 잔디벌판과 대조적으로 거친 자연이 배치되어 있다. 또한 안도는 ‘추상성과 구상의 중합’이라는 글에서 알버스의 회화와 피라네시의 회화를 통해 자신의 건축의 목표가 추상성과 구상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정사각형의 편심적 구성을 한 알버스의 작품에 표현된 정방형의 윤곽과 색채는 관찰자가 그 정방형의 윤곽을 안에서 밖으로 또는 그 역으로 시선을 유도하여 평면적 상태를 입체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일종의 착시적인 효과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안도가 견지하는 추상이란, 시선이 정지된 평면적 순수함이 아니라 정방형의 윤곽들에서 움직여지는 시각적 동요를 이끌어 내어서 입체적인 볼륨의 극적인 효과를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현대건축의 기하학적 단순함을 강조하기 위한 모더니즘적 균질 공간의 개념을 극복하는 그의 중요한 추상적 요인이 된다. 또한, 안도에게 이것은 실제로 단순함의 결과로서 복잡함을 가지는 공간을 창조하는 원리인 것이다. 구상의 의미에 대하여 “인간의 육체가 각인된 구상적인 것”이라는 설명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고인돌을 연상시키는 유기적형태의 의자에는 인간의 육체가 역사성을 가지고 각인되어 있는 것이겠다. 피라네시G.B.Piranesi의 동판화 ‘환상의 감옥Carceri d'Invenzione’은 소실점의 위치가 불명확하고 그것을 통해 바닥과 천장의 깊이감 파악이 흐려지게되고 시각적 강조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것은 관찰자와 공간과의 관계가 모호하게 설정되어지는 시각적 혼란을 야기시켜서 관찰자에게 모호성과 복합성, 신비로움을 유도하게 하며 관찰자에게 나름대로의 시각적인 작용과 조작을 유도한다. 추상적 언어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공간 형태가 어떠한 장소와 상황에서 이행되어지느냐에 대한 과정의 문제로서 구상에 대한 의도가 짐작된다. 따라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공간속의 상황, 예를 들어 지역, 풍토와 풍경, 문화 같은 건축외적인 정서가 건축과 동화되어 일어나는 의미론적 절차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안도 다다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특징의 사례를 종합해보면 일본전통 차경기법이 그의 건축속에서 인간의 삶에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로 읽혀진다. 1월호에 계속됩니다.

제주에서 감상하는 자연, 건축, 예술 - 1편

자연과 함께하는 명상전시공간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

제주 동측에 위치한 명상공간 유민미술관(지니어스 로사이)과 글라스하우스를 살펴보기로 한다. ‘땅을 지키는 수호신’ 이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온 지니어스 로사이는 서귀포 해안 섭지코지 내에 2009년 조성되어 현재는 유민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자연과 호흡하는 명상전시관을 표방하고 지하전시관의 현재 전시는 유리공예품들이 있는 공간이다. 이글은 월간 이코노미21에 칼럼으로 쓴 글을 정리한 것이다. 섭지코지의 명물이 된 이곳을 향해 가는 길은 5월의 경이로운 제주 봄 풍광이 한컷 한컷 함께했다. 동양미래대학교 건축과 이정미 교수 넓은 바다를 끼고 언덕길을 걷다 보면 바다를 배경으로 흰 등대가 있는 오름이 감탄스럽게 펼쳐진다. 잔잔한 파도의 바다를 배경으로 또 그 바다의 파도가 만들어 낸 오름의 조형미가 실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언덕을 넘으면 또다시, 초현실적인 넓은 잔디벌판이다. 광활한 잔디벌판 저 멀리 왼쪽, 나지막이 수평으로 자리한 명상공간 지니어스 로사이가 보인다. 그 우측 해안언덕 위에 글라스 하우스가 잔디벌판을 전경으로 제주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성산을 사이에 둔 채 펼쳐진다. 두 건축공간 모두 성산일출봉을 향해 각기 다른 건축어휘로 열려있다. 이곳 진입은 긴 산책로를 따라 굳이 꼭 걸어보시길 권한다. 잔디벌판에 들어서 걷는 길은 마치 현실이 아닌 듯, 초현실의 세계와도 같은 느낌이다. 익숙하지 않은 전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벌판을 가로질러 천천히 다가오는 좌측 지니어스 로사이는 가로로 긴 낮은 입면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절묘하게 저 먼 바다의 수평선 높이다. 상대적으로 우측에 위치한 글라스하우스는 성산의 지형을 기학학적 단순형태로 표현한, 지형으로부터 솟아있는 돌출된 형상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감아 도는 삼각면등대오름을 우측으로 하고 초현실적인 벌판을 한참을 걸어 건축가 안도 다다오 설계의 명상공간, ‘지니어스 로사이’ 진입로로 들어선다. 건축물의 가로로 긴 입면과 띠를 이룬 지붕의 가로선에 출입구는 점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파사드를 하고 있다. 지니어스 로사이의 진입로 구성은 안도의 건축어휘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매끄러운 콘크리트 질감으로 높게 올린 폐쇄적 건축벽면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제주 현무암의 거칠고 낮은 담장의 개방적 벽, 그 담장 너머에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 있다. 대비적 구도로 이루어진 진입로의 좌우는 안도의 특징적 공간요소인 폐쇄와 개방, 매끄러움과 거침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인간의 일상세계와 피안의 명상세계를 추구한 건축공간의 경계이다. 건축공간에 대한 암시와 호기심, 상대적으로 압도적인 개방감을 가지는 낮은 담장의 대비를 통해 자연을 강하게 실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자연은 거칠고 강한 특성으로 인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라면, 안도는 건축공간을 안식처가 될 것을 목표하였을 것이다. 구성적 형태는 1920년대 예술사조 ‘데 스틸’ 시기 조형물을 보는 둣 한 구성을 보여준다. 데스틸은 네델란드의 잡지이자 예술사조가 된 더 스타일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주론에 입각하여 존재하는 색채는 노랑, 빨강, 파랑의 3원색뿐이며, 그것을 기본색으로 결정하고 노랑을 광선의 운동 즉 수직을, 파랑은 노랑에 대비되는 색으로 수평한 천공이며, 빨강은 노랑과 파랑에 균형을 잡히는 것, 빛을 수직성으로 수평한 그것은 태양을 도는 지구의 궤도로 상정하여 오로지 수직과 수평만을 적용한 예술을 주장하였던, 그것으로부터 조형적 건축을 향하여라는 16가지 건축이념을 발표하여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건축, 외부로 확장하는 원심형 건축, 기능적인 것은 물론, 색채와 재료등의 요소들 각각을 중시하며 통합으로서의 건축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신비적인 수학자 쉔마커스의 우주론에 기초한 것이다. 12월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