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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beautiful and classy life.

이이남 LEE LEE NAM 뉴미디어 아티스트 - 2편

살아있는 그림 (les peintures vivantes)

살아있는 그림(les peintures vivantes)

광주 토박이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

그의 작품은 여타의 미디어 아티스트 작품과 달리

대중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와이? 왜 그의 미디어 아트가

대중으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일까?

왜냐하면 그는 대중의 코드와

동양·서양의 코드를 읽어내는 ‘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아트는 현실과 가상인

두 현실이 공존한다.

"그러나 나는 시뮬라크르(가상) 작품을 통해 진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왜 사람들은 진리를 추구하는가? 에 대한 물음은

‘진리의 사유’에 대한 지평을 열었다.

진리를 깨우칠 때

우리는 두려움·욕망·불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내가 발견한 진리는 예술작품으로 변형된다.

나의 작품은 감성을 자극하는 것을 넘어서

내게 다가온 숭고함을 구현하고 있다."

류병학(미술평론가)

 

 

 

 

 

이미지 다시 태어나는 빛 - 2019 (Reborn Light - 2019) 12min 30sec Beam Project 2019

이이남

 

2019 세계수영선수권 대회 개회식 피날레 미디어 아트 감독

ISEA 국제전자예술심포지움 개막식 미디어 감독

개인전 (52회)

2019 ‘다시 태어나는 빛 – 뿌리들의 일어섬’ IESA대학, 파리, 프랑스 ‘이이남, 빛의 조우’ 서울식물원, 서울, 한국

주요전시

2019 ‘Flim & Arts’, 뿌리들의 일어섬 전, 스타시네마, 테이트 모던, 런던.

Artificial Intelligence ‘Hyper-Intelligence’ Mr. Media Lab 콜라보전 서울, 한국

‘한국 비디오 아트 7090: 시간의 이미지 장치’ 전, 국립현대 미술관, 한국

작품소장처

토마 파운데이션(미국), 지브라스트라트 미술관(벨기에), UN본부(미국),

UN사무국(미국), 아시아 미술관(샌프란시스코), 수닝예술관(중국), 예일대학교(미국), 워싱턴 주미한국대사관(워싱턴), 후진타오 영부인(중국),국립중앙도서관(서울,한국), 인천국제공항(인천,한국), 리움미술관(서울, 한국), 한미미술관(서울,한국), 컬렉션 솔로(마드리드,스페인), 아랍에미리트 전 자이드 대통령 영부인(아부다비,아랍에미리트)

 

 

여기서 말하는 대중의 코드와 동양/서양의 코드란 대중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동〮서양의 명화를 차용한다는 것에 국한 되기보다 그 동〮서양의 명화에 대한 현실인식을 관통한 탁월한 분석력을 뜻한다. 필자는 이 점에 대해서 구체적인 작품을 사례로 들어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필자가 그의 일명 ‘디지털-명화’를 언급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디지털-명화가 태동하게 된 초기 작업을 살펴보아야만 할 것 같다.

미디어 아티스트 이이남은 광주 조선대와 동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그는 졸업 후 조각 작품으로 대한민국 미술대전 특선과 전국조각가협회 특별상도 받았다. 그런 조각가 이이남을 미디어 아티스트로 전이시킨 ‘사건’은 무엇일까?

그가 1997년 순천대 애니메이션 학과에서 미술해부학 강의를 맡았을 때, 학생들이 찰흙으로 스톱 애니메이션을 작업하는 것을 보고 ‘움직이는 조각’에 삘이 꽂힌다. 그는 곧 17인치짜리 작은 모니터를 구입해, 그의 전공인 조각을 살려 클레이스톱 애니메이션, 즉 ‘움직이는 조각’ 영상을 만든다.

1998년 제작된 이이남의 클레이아트 애니메이션 <4학년>은 플라스틱에 담겨있던 찰흙 덩어리로 당시 순천대 애니메이션학과 4학년 학생들을 모델로 삼아 제작된 작업이다. 찰흙 덩어리로 만들어진 남학생은 다시 찰흙 덩어리로 돌아가 곧 여학생으로 변신한다. 물론 이이남은 찰흙 덩어리로 학생들 이외에 다양한 동물들(개, 고양이, 호랑이)도 만들었다.

특히 호랑이가 자신의 꼬리를 잘라 먹는 장면을 보면 폭소를 터뜨리지 않을 수 없다. 찰흙 스톱 애니메이션은 이이남의 작업에 큰 변화를 주었다. 이를테면 이이남은 찰흙 스톱 애니메이션을 통해(이전의 ‘무거운’ 조각에서 해방되어) ‘가볍게’ 작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가벼움’은 우리 상식을 뒤집는 ‘유머감각’을 뜻한다. 그 ‘가벼움’은 그의 디지털-명화에서 대중적 호응을 얻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0년대 말 다양한 클레이아트 애니메이션을 작업했던 이이남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 그래픽 애니메이션 작업에 몰두한다.

그는 2002년 SK텔레콤 애니메이션 공모전에 <자살>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는다. <자살>은 선비와 물고기의 자살법을 그린 것인데, 선비가 돌에 매달려 물속으로 들어가는 반면, 물고기는 풍선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간다. 너무나도 참을 수 없는 자살의 가벼움이 아닌가? <선악과>는 사과를 사이에 두고 하와와 뱀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던 ‘선악과’와 달리 이이남의<선악과>는 황당하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하와는 사과가 아닌 뱀을 잡아 먹으면서 관객에게 윙크하기 때문이다. <복수>는 나무를 자르는 남자에 대한 나무의 복수를 다룬 애니메이션이다. 나무를 자르던 남자가 나무의 그늘에서 누워 잠잔다. 그런데 나무는 자신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나무를 자른 남자에게 복수한다.

은 사격표지판에 대한 엉뚱한 발상을 그린 애니메이션이다. 총알에 맞은 표지판들은 모두 울상이다. 그런데 총알을 맞지 않은 표지판은 낄낄거린다. 왜냐하면 그 웃는 표지판은 날라오는 총알들을 모두 피했기 때문이다. 총알을 피할 수 없는 표지판이 총알을 피하기 위해 움직인다는 발상은 이후 ‘그림의 떡’으로 알려진 명화를 움직이게 만드는 계기를 마련하게 한다.

 

이미지 박연폭포(Parkyeon Waterfall) 5 x LED TV 2017

 

이이남은 2004년에 오브제에 모니터를 접목시킨 다양한 작품을 제작한다. <밥 먹고 잠자라>는 옛 교실 의자 위에

놓인 도시락의 뚫린 구멍으로 하늘의 구름이 떠가는 영상이 나오는 작품이다. <호주머니 속 풍경>은 옷걸이에 걸린 자킷 호주머니 속에 모니터를 장착해 마치 호주머니 속에 동전들이 떨어지는 모습을 그리고 <생명으로부터>는 고목에 모니터를 장착해 초록 꽃잎들이 흐르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브제와 모니터의 접목 작업은 2005년까지 이어진다. 이이남의 <아이 러브 골프>는 골프장 영상과 (홀컵의 위치를 알려주는) 실제 깃발로 접목된 일종의 영상설치작업이다.

전시장 벽면에 골프를 치고 있는 골프장 영상이 투사된다. 그리고 그 골프장 영상 앞에 실제 깃발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라이트로 인해 그 깃발의 그림자가 영상에 겹쳐진다. 따라서 골프를 치는 사람들이 마치 그 그림자-깃발을 향해 스윙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이이남은 2005년 <실상과 허상>시리즈 작품을 제작한다. 이이남은 ‘에스파냐의 카라바조’로 불리는 프란시스코 데 수르바란(Francisco de Zurbaran)의 <정물화(Bodegon)>(1636)에서 가운데 화병 2개 대신에 장미꽃과 유리잔을 교체시켜 놓았다.

그런데 유리잔을 보면 영상이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그 영상은 어느 전시장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의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이미지 박연폭포(Parkyeon Waterfall) 5 x LED TV 2017

그렇다면 이이남의 <실상과 허상>을 보고 있는 관객은 유리잔 속에 담겨있는 관객과 다르지 않단 말인가? 그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대부분의 관객은 작품 앞에서 단 5초도 서있지 않는다. 관객들은 전시장의 작품을 마치 지나가면서 보듯이 지나친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실상과 허상>은 마치 금욕적인 수르바란의 정물화처럼 관객에게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라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전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이이남은

“제 작품을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때 가슴이 쓰립니다”

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알 수 없는 작품 앞에서 시간을 할애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우리가 축구경기를 즐기려면 최소한 축구 룰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관객이 미술 작품을 즐기고자 한다면 미술의 룰(미술사의 문맥)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 까닭일까?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가

“관객이 한 그림 앞에 최소한 5분만 서있었으면 좋겠다”

고 원했다. 그러나 관객은 작품 앞에서 5분은 고사하고 5초도 서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이남은 관객이 자신의 작품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다니엘 아라스가 기대한 5분 동안 서있도록 하기위해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지나가는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이이남은 관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 위해 우리들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디지털 기술에 주목한다.

이이남의 ‘명화는 살아있다!’

이이남은 2004년 이이남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명화의 재매개(remediation) 작품을 제작한다. <김홍도, 신-묵죽도>가 그것이다. 김홍도의 <묵죽도>는 왼쪽 대각선 방향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김홍도는 대나무 줄기를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으로 쳤다. 조선시대 대부분 ‘묵죽도’가 오른쪽으로 쳤다는 점을 참조한다면, 김홍도의 <묵죽도>가 특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민환은 어디선가 김정희의 난초 화법을 빌려 대나무를 오른쪽으로 치는 것보다 왼쪽으로 치는 것이 몇 배 어려운 기술이라고 말하면서 왼쪽으로 순식간에 처내려간 김홍도의 <묵죽도>를 놀라운 기교를 과시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단원에게 대나무는 흔히 말하는 ‘군자’의 상징으로서의 고결한 대나무가 아니라 필치를 유감없이 발휘하는 소재일 뿐이라고 간주된다. 그런데 대나무 줄기의 필치를 보면 밑에서 위로 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의 농담은 줄기 하단보다 상단이 진하다. 그렇다면 대나무는 바람에 대응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자, 이제 이이남의 <신-묵죽도>를 보자. 오잉? 이이남의 <신-묵죽도> 대나무는 마치 ‘절개’를 비웃듯 가볍게 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신기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당연히 움직일 수 없다고 확신한 그림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관객을 더 놀라게 하는 것은 흔들리는 대나무 위로 눈이 내리는 것이다. 눈은 대나무 위에 서서히 쌓인다. 그리고 대나무 위의 쌓인 눈은 차츰 녹아 원래의 모습으로 컴백하는 것이 아닌가?

이이남의 <신-묵죽도>는 김홍도의 <묵죽도>를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다. 여기서 재매개는 기존 미디어(회화)를 디지털로 미디어화 시킨 것을 뜻한다. 이를테면 이이남의 디지털 아트는 회화(명화)를 디지털로 재구현(Refashion)시킨 것이라고 말이다. 마치 절개를 지키듯 움직이지 않는 김홍도의 <묵죽도>는 디지털을 통해 마치 절개를 버린 듯 바람에 흔들린다. 이이남의 <신-묵죽도>를 보는 관객은 사색에 잠기기는커녕 오히려 놀란다.

그렇다! 관객은 이이남의 <신-묵죽도> 앞에서 4분을 즐긴다.

이이남의 재매개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6년이다. 이이남의 대표작들 중 하나인 <8폭 병풍>도 2006년에 제작된다. 잔잔한 가야금 소리와 함께 소치 허련의 <홍매도>의 텍스트(제발)이 바람에 날리듯 의제 허백련의 <묵죽도> 화폭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나비를 전문적으로 그렸다고 하여 ‘남나비’로 불렸던 남계우의 <화접도>에 그려진 나비가 갑자기 날개 짓을 하더니 의제의 <산수화> 화폭으로 사뿐사뿐 날아간다. 도대체 ‘그림의 떡’인 나비가 어떻게 날개 짓을 하면서 날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왜냐하면 8폭 병풍의 화폭이 화선지가 아니라 LCD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기 스위치를 켜면 병풍에서 가야금 소리가 나오고 나비가 날아다니고, 꽃잎과 나뭇가지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일반 관객은 21세기 미디어 병풍 앞에서 신기한 표정으로 런닝타임 5분 30초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즐긴다.

 

 

이미지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Gogh-The Starry Night, Arles 75 inch LED TV 2019)_17min

하지만 박물관이 모든 유물들을 예술작품으로 전이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란 점에 앙드레 말로는 주목한다. 박물관은 박물관의 물리적 한계(크기) 때문이 아니라 건축물과 한 몸인 벽화나 모자이크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등을 박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유물들은 박물관으로 운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계 각국에 있는 모든 박물관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볼 수 없다.

 

이미지 다시 태어나는 빛-2019 (Reborn Light-2019) 12min 30sec Beam Project 2019

 

앙드레 말로 왈,

“오늘날 대학생은 대부분 컬러 사진 복제품인 훌륭한 작품들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또 사진 복제품을 통해 인류의 많은 그림들, 오래된 고대의 예술들, 먼 옛날 콜럼버스 발견 이전의 인도와 중국의 조각 작품들, 일부 비잔틴 미술품, 로마의 벽화들, 원시적이고 대중적인 예술들을 만날 수 있다.”

앙드레 말로는 사진 복제품을 통해 세계 각지에 있는 모든 작품을 볼 수 있음을 간파한다. 따라서 그에게 도록은 일종의 ‘벽 없는 박물관(Museum without Walls)’이되는 셈이다. 앙드레 말로는 ‘벽 없는 미술관’을 ‘상상의 박물관’으로 명명했다. 왜냐하면 상상의 박물관은 죽은 유물에 생명력(상상력)을 불어넣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는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영화로 재매개한 것이 아닌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명화 복제품을 통해 명화를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 한 것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앙드레 말로의 ‘상상의 박물관’을 디지털 아트로 재매개한 것이 아닌가? 숀 레비 감독의 <박물관이 살아있다!>와 마찬가지로 이이남의 디지털-명화 역시 디지털 기술로 상상을 현실로 만든 것이다. 그렇다!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는 ‘명화가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이남의 탁월한 분석력은 동양과 서양의 명화 선정에도 나타난다. 이이남의 <모네와 소치의 대화>가 그것이다.

이이남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과 소치의 <추경산수화>를 옆으로 나란히 배치해 놓았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서 해와 배가 소치의 <추경산수화>로 서서히 흘러가고, 소치의 <추경산수화> 전경에 있는 배와 섬이 모네의 <해돋이, 인상>으로 천천히 흘러간다.

모네의 <해돋이, 인상>해가 소치의 <추경산수화> 산 뒤로 은폐되자 모두 밤으로 바뀐다. 밤이되자 건물들에 불빛이 밝혀진다. 흥미롭게도 소치의 <추경산수화> 전경에 있는 섬의 집에도 불빛이 밝혀진다. 소치의 <추경산수화>에 쓰여진 텍스트(화제)가 마치 바람에 날리듯 모네의 <해돋이, 인상>으로 날라간다.

이이남은 <모네와 소치의 대화>는 서로 다른 공간·시간에 제작된 모네와 소치의 그림들을 마치 서로 선물을 주고받듯이 디지털로 ‘이동’시켜 자연스럽게 교감한다. 마르셀 뒤샹 이후 급진적인 작품을 하고자 하는 작가라면 ‘빌려쓰기’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이남은 명화를 일종의 ‘레디-메이드’로 사용한다. 물론 그는 명화를 그대로 제시하지 않는다. 만약 그가 명화를 그대로 제시한 것으로 만족했다면, 그는 뒤샹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명화를 ‘되돌려-먹이기’ 한다, 어떻게? ‘차도살인지계(借刀殺人之計)’가 그것이다.

차도살인지계? 유하는「武歷 18년에서 20년 사이―무림일기1」 밑에 ‘차도살인지계’를 “남의 칼로 적을 침”이라고 언급해 놓았다. 그렇다면 이이남의 <신-금강전도>는 이이남 자신의 손이 아니라 ‘남의 손을 빌려 상대방을 치는 작품’이란 말인가? 남의 손을 빌린다? ‘남의 손 빌려쓰기’의 최초 사례는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될 것이다.

하지만 뒤샹의 <샘>은 남의 손을 빌려 제작한 작품이지만 ‘적’을 치는 작품은 아니다. ‘적’을 치는 작품? 혹 그것인 기존 작품에 똥침을 놓는 작품이 아닐까? 우리는 흔히 그것을 ‘패러디(parody)’로 부른다. 당신도 아시다시피 패러디는 미술작품에서부터 시나 문학, 그리고 음악이나 영화 또한 광고에 이르기까지 주로 명작을 모방(인용 혹은 차용)하여 그것을 풍자 또는 조롱하는 작품으로 이해하곤 한다.

-중략-

이이남이 차용한 명화들은 대부분 자연을 그린 그림들이다. 왜일까? 왜 그는 자연을 그린 명화를 즐겨 차용한 것일까?

그는 농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대학시절까지 집안의 농사일을 도왔다. 물론 그는 당시 “농삿일이 죽도록 싫었다”고 한다. 그는 “왜 시골에서 태어나서 이런 고생을 할까”를 입에 달고 살았단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그의 “시골 경험이 예술적 감수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그는 특히 의제 허백련의 그림을 적잖이 차용했는데, 허백련 그림에 그려진 풍경이 이이남의 어린 시절 고향의 풍경이다. 따라서 그는 자연을 그린 그림들을 자연스럽게 즐겨했던 것이다. 그의 작품들이 온화하고 서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혹자는 이이남의 작품들을 보고 ‘착하고’ ‘예쁘고’ ‘범생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비아냥에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는 힘겨운 일상을 살아가는 대중에게 ‘아트’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무거움’을 ‘어깨’에 짊어지게 하기보다 오히려 웃음(가벼움)을 선사하는 ‘행복전도사’를 자처한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는 것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이남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디지털 팝 아티스트로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디지털 팝 아티스트인 이이남은 좀 더 대중에게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새로운 ‘유통문화’를 만들고 있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저렴한 가격으로 작품을 구입해서 벌 수 있는 유통구조 말이다.

앙드레 말로는 “상상의 미술관이 자신의 변모를 계속 추구한다”고 진술했다. 백남준은 미술관을 방문했던 관객들이 TV 앞에 모여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아차렸다. 그는 1984년 서울과 뉴욕, 파리, 베를린의 TV를 통해 <굿모닝 미스터 오웰(Good Morning Mr. Orwell)>을 방영했다. 그는 미래의 미술관을 대중매체로 보았다고 말이다. 하지만 백남준은 그것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제2의 백남준으로 불리는 이이남은 서두에서 중얼거렸듯이 스마트 TV뿐만 아니라 모바일과 아이패드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물론 당신은 이이남의 디지털-명화를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여 소장할 수도 있다. 아이폰 어플에 있는 10작품은 단 1.99달러에 구입할 수 있고, 아이패드 어플에서는 12점의 작품을 3.99달러에 소장할 수

있다. 만약 아날로그 아트가 희소성을 지향했다면, 디지털 아트는 대중성 확보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을까?

 

 

 

이미지 고흐 별이 빛나는 밤에 Gogh-The Starry Night, Arles 75 inch LED TV 2019)_17min

 

현대미술연구소 김옥렬 대표 Kim, Ok-real 빛의 재탄생, ‘세례 받는 TV’

이이남의 전시의 주제는 <빛이 되다 Becomes Light>이다. 이번 전시<빛이 되다> 중에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빛의 재생 Reborn Light’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시도하고자 하는 ‘빛’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현대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관차가 레일 위를 달리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고 그러한 불안을 해소하고 허상에 갇혀 방황하는 인간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본다.

그 의미를 찾아가는 작가의 사유방식은 ‘세례 받는 TV’로 인간의 은유 혹은 환유를 보여준다. 작가는 그것은 TV모니터가 물속으로 들어가 잠기는 것을 죽음으로 다시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을 부활로 설정하고 있다.

작가의 이러한 시도에는 ‘TV는 인간을 닮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또한 작가는 인간의 신체와 정신의 구분처럼, TV를 콘텐츠와 프레임의 관계로도 해석한다. 이처럼 작가는 그간에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자연과 도시, 진품성과 복제성 등 미디어 콘텐츠가 가진 기술로 시〮공간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그리고 이번 전시작은 날개짓을 하는 비둘기의 영상이 담긴 모니터를 물속으로 잠기게 하고, 다시 그것을 밖으로 나오게 하는 설치물을 통해 ‘세례 받는 TV’를 탄생시켰다.

그렇다면 세례 받기 전과 세례를 받고 난 TV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을까?

이점은 애초의 의도를 떠나서 소통의 과정과 결과에서 다양한 시각의 차이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죽음을 넘어 빛’이 되는 TV에 대한 은유는 그 자신의 표현에서처럼, ‘인간의 나약함과 사회적 시스템에서 받게 되는 불안, 그러한 불안에 직면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억압을 뚫어내고자 하는 잠재된 욕망처럼, 무의식에 내재된 충동 역시 사회적 효용성을 떠나 규칙의 위반을 통해 희열을 추구한다. 이러한 추구는 라캉(J. Lacan)이 말한 일종의 과잉욕망이 죽음을 향한 욕망이듯 충동 역시 현실너머의 실재와 관련되고 있음이다.

‘세례 받는 TV’는 금지된 욕망과 충동의 대리만족, 그것의 전략인 승화(sublimation)의 허구성으로 살아 있으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새로운 탄생을 위해 물속으로 들어가 죽음을 맞이한다. ‘TV모니터’가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죽음으로 상징하는 이유다. 이를테면 부활에는 죽음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전기의 힘에 전적으로 몸을

맡긴 TV는 죽음을 향해 담담하게 마주하며 하강한다. 이는 상흔(trauma)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간의 용기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순간이야 말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과 직면하는 역설의 순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하다.

저항과 전복이 내제된 라캉의 ‘희열’(Jouissance)에는 결핍의 충족을 위해 전복을 시도하는 과잉욕망이 내재되어 있다. 만족 보다는 고통을 수반한다는 과잉욕망은 충동에 사로잡혀 금기를 넘어선다. 그 너머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대부분은 그 죽음과의 대면을 피할 수 있을 만큼 피해 주어진 체계 안에서 안주할 수 있는 대체물에 상상이 투영된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모습이 투영된 TV, 어쩌면 인간 그 자체인 TV는 오늘날 순종과 포기를 통해 소외와 박탈을 경험해야만 하는 상실감을 화려한 ‘빛’으로 삶을 담아내는 것이리라. 삶을 둘러싸고 있는 허상들, 그 속에서 우리는 그 어떤 선택을 하던지 간에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과정, 그 과정이 왜곡과 변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이유이

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화 과정을 통해 작가가 인식하고 있는 ‘빛’의 의미는 마치 거울 없이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처럼, 타인 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앞서 얘기한 ‘빛’의 의미란, 타인 속에서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나, 그것이 바로 ‘세례 받는 TV’에 투영된 생명의 빛일 것이다. 이렇게 ‘빛’의 부활은 죽음을 넘어야 비로소 빛이 되는 이유일 것이다.

현대미술연구소 대표 김옥렬 Kim, Ok-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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