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1편 - 타이캉루(泰康路) 티엔즈팡(田子坊)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10
채워져서 아름다운 감성공간 상하이 타이캉루 티엔즈팡 /정희정·김옥예 /도서출판미세움을 토대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상하이-1편
타이캉루[泰康路]
티엔즈팡[田子坊]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상하이 한국문화원 자문위원
김 옥 예 국경없는 문화공동체 회원
Canon EOS 5D Mark II 1ㅣ100 F3.5
‘한국의 역사 속에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세계적인 항구 도시이며 거대 중국의 경제와 문화를 대표하는 상하이, 상하이 타이캉루 ‘티엔즈팡’은 우리나라의 홍대 골목이나 삼청동, 소격동 혹은 인사동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상하이 타이캉루 티엔즈팡’을 살펴보며 우리의 도시와 농촌 마을들이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도시 혹은 마을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Canon EOS 5D Mark II 1ㅣ200 F7.1
타이캉루 티엔즈팡은 상하이 주거건물의 특징인 스쿠먼 양식1)과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1998년부터 예술 단지로 자리매김하다가 200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업공간, 예술공간, 주거공간이 융합되면서,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져 독특하고 정감 있는 창의적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골목을 걷다 보면 다양한 공간들의 역사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스쿠먼 양식의 상업공간과 소박한 주거공간을 보며 즐거워지는 이유는 공간 속에 인간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1) 19세기 상하이 가옥의 양식으로써 중국 전통양식과 서양식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중국의 가옥양식.
옛 것과 새 것의 아름다운 조합!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낡은 것을 거부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 같다. 낡은 것도 새로운 것과 잘 어우러져 또 다른 것을 생성하게 되니 말이다. 각종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상점들의 소품과 사인물들로 사람들은 다양한 상품을 구경하기 바쁘고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
2010년의 상하이 엑스포(Shanghai Expo)를 계기로 확대된 이곳 티엔즈팡은 하루 3만여 명의 방문객이 드나들며 상하이에 가면 놓쳐서는 안 될 관광명소로 나날이 거듭나고 있다. 새로운 것과 옛 것이 함께 채워져 발전하는 이곳이야말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문화예술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무질서 속의 질서가 있는 이곳은 소통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이며, 금지와 허락이 공존하는 주거와 상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은 밤 10시가 되면 보안원이 보초를 선다. 거주하는 주민들의 잠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다.
과거 조상들이 지냈던 공간 속의 나를 보며, 또 앞으로 후대들이 지낼 모습을 떠올리면 이것이야말로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타임머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티엔즈팡(田子坊)의 유래"
타이캉루는 티엔즈팡 한쪽에 있던 거리 이름으로 작은 길가의 시장이었다. 1998년 9월부터 타이캉루 길을 새롭게 포장하게 되면서 진흙투성이었던 대로가 몰라보게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정부의 지지를 받으면서 타이캉루는 다푸치아오(打浦桥)구역의 기능적 위치를 근거로 하여 특색 있는 대로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고 1998년 12월 28일 문화발전회사가 타이캉루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상하이 ‘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유명한 천이페이(陈逸飞), 얼동지앙(尔冬强), 왕지에인(王劼音), 왕지아쥔(王家俊) 등의 예술가들과 예술·공예 상점 등이 타이캉루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곳은 점차 예술가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찿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60 F2.8
얼동지앙 스튜디오에서 매월 여는 가극과 음악회 등으로
인해 사람들로 넘쳐났고, 타이캉루 르티엔 도자기 회사는 국제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 전람회와 전시회 및 교류 등으로 세계적 도자기 예술계에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상하이의 독자적인 한 부류를 이루었던 대나무 조각 공예 회사는 상품의 판매가도 높일 뿐만 아니라, 판매시장도 광범위하게 넓히게 되었다.
또한 타이캉루와 스난루(思南路: 길 이름) 입구의 골동품 상점은 골동품 소장자들을 끌어들였다.
타이캉루 210번지는 ‘티엔즈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중요 지역으로 변모하였고, 동시에 공장 건물들은 예술의 재구현으로 인해 다른 스타일의 작업실(Studio)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천이페이의 스튜디오는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스타일로 구현되었고, 실내의 벽난로는 장식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품위 있는 건축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엄동설한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을 피워 놓고 벽난로 옆에서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서 창조적인 예술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그것은 예술에 대한 영감을 떠올리기에 좋은 분위기다. 얼동치앙의 스튜디오는 공업혁명의 흔적이 엿보인다. 평상시에도 시동 가능한 기중기 두 대를 진열해놓았고, 천장은 수입 투광판과 현대적인 건축자재로 재구현되었다. 어떤 물품들은 장인들의 손을 거쳐 또 다른 상품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충만한 예술적 생산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천이페이 선생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담아낸 ‘동방의 작은 조각’은 파리의 세계조각전시회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참가한 화교(華僑)의 작품이다.
당시 이것은 일종의 창작과 동시에 새로운 작품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도자기 예술가인 지미(杰米)는 도자기 공방을 열고 많은 외국인들을 끌어들여 도자기 기술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였다. 홍콩의 유명한 도자기 작가인 정이(郑祎) 또한 타이캉루 ‘락천도예관(乐天陶艺馆)’을 만들어 국제 도자기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티엔즈팡 내의 5층 작업장은 공업 건물로 재건설되었다. 5,000평방미터 내에 10개국의 예술가 집단이 들어와 이곳에 설계실을 설립하였다.
같은 공장 문 앞에는 10개의 다른 국기가 나부끼고 있으며, 이는 마치 국제예술박람회를 연상케 한다.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융합하며 타이캉루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타이캉루 길가에는 예술품과 공예품 상점이 40여 개나 자리 잡게 되었고, 작업실과 설계실도 2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가 예술의 거리를 형성하기 전에 기능적인 역할이나 기업의 분야 등 전체적인 기획을 하여 건설적인 부분과 환경적인 부분들이 많이 개선되었다.
그리고 당시 모아진 자금으로 천이페이 선생이 설계한 ‘예술의 문’을 예술의 거리 이정표로 설치하게 되었다.
많은 예술가와 상가들이 들어서고, 그들 스스로 타이캉루를 관리하고 기획하게 되면서 현재의 예술의 거리(Art Street)가 되었고 각자의 지혜와 능력이 모이면서 타이캉루는 새로운 발전과 새로운 기회로 도약하게 되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50 F3.5
"타이캉루(泰康路) 지역의 역사적 특징"
타이캉루는 프랑스 조계지2)의 도로를 연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조계지 확장 이후 얻게 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측 지역과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잘 정돈된 프랑스풍의 양식 건물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상하이의 특색이 매우 짙은 스쿠먼 건축 또한 함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건축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타이캉루 지역의 리농문화3)가 만들어졌다.
타이캉루 지역이 위치해 있는 루완취(卢湾区)는 프랑스 조계지 문화를 주요 특징으로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대다수 전도사나 문화인들이었고, 루완취의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역시 대부분 부유층에다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다. 동시에 조계 지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루완취에 거주하게 되었고 문화활동이 빈번하게 되었다.
2)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아편전쟁 이후 1845년에 영국이 상하이(上海)에 둔 것이 최초다. 이후 톈진(天津)·광저우(廣州)·샤먼(廈門) 등 각 개항장에 두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에는 격증하여 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8개국이던 조계가 무려 28개나 되었다. 조계 내의 행정권은 외국에 속하고 치외법권도 인정되어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여 해관(海關)의 관리권과 함께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적 침략의 기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조계는 점차 폐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완전히 중국에 반환되었다.
3) 리농건축·리농주택이라고도 부른다. 골목을 가운데 두고 일렬로 붙어 있는 2~3층의 주택들을 리농주택 혹은 석고문 주택이라고 부르며, 개항 후 상하이의 조계지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택형태로서 상하이 특유의 근대건축물이다.
조계지 내에서는 각종 문화가 함께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신기한 것을 쫓는 해외파 문화가 있었고, 호화로운 사치를 중시한 소일문화가 있었으며, 격진적인 항의와 비판적인 문화도 있었다.
스쿠먼 건축의 구석방에서는 수많은 중국 문예계의 신생역량이 배출되었다.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가 건축이나 생활방식 등에서 재현되었다면, 중국 전통의 예의규범이나 문화는 여기에서 생활한 각계각층의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계지의 건설은 상하이 시의 발전뿐만 아니라 서방문명의 전파를 부추기게 되었고, 근대 서방의 시정건설과 관리방법을 운용하여 중국 고유의 도시구조와 기능이 크게 변하였다.
조계지 내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진기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서방 문명이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이 문화든 생활이든 중국인들과 서방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방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서방 문명을 퍼뜨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상하이 주민들은 서방 문화를 정리하여 중국의 전통문화 속으로 가지고 들어옴과 동시에 자신의 특색을 발휘하여 그것들이 해외파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하였다.
Canon EOS 5D Mark II 1ㅣ50 F2.8
이와 동시에 루완취의 남부는 조계지역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의 하층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오두막이 대부분이었던 이 지역은 기본적인 시정부의 건설도 없었고 생활 환경이 매우 나쁜 노동자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도시화가 진행되었던 북쪽은 구식 리농 건축물들이 많았고 프랑스풍의 건축물들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이곳은 인구 밀도가 높고 대부분 작은 상점들이었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소상인이나 종업원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타이캉루는 완전히 다른 남부의 일부였는데, 이 때문에 앞서 말한 북부 조계지의 문화와 남부 중국의 민간문화가 기이하게 융합된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지역에는 문학·예술계의 저명인사나 서양의 영향을 받은 서양 특색의 생활 방식이 존재하였고 리농문화의 시끌벅적함을 동시에 볼 수 있었으며 각기 생계를 위해 좌판들을 꾸려가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악수를 하면서 아침인사를 하는 서양식 인사법을 볼 수 있고 서양 악기의 은은한 음악소리도 들렸다. 또한 도로변의 좌판에서는 위생적이지 않은 각종 먹거리를 맛볼 수 있었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예술인들의 뛰어난 잡기와 무술시범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질서와 혼란, 고상함과 통속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80 F3.2
루쟈완 구역이 중국과 서양의 결합부였다는 것 그리고 조계지와 비조계지 생활 형태의 융합 지역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이는 중국인 지역의 바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고 동시에 중국인 지역도 여기를 통해서 서방 문명의 중국 전통에 대한 충격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