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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문명의 빛 - 이집트<Egypt>문명을 통해 본 공공디자인 - 1편 소통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14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Canon EOS 5D Mark II 1ㅣ30 F2.8 고대 이집트인들은 소통하고 기록하기위해 상형문자를 만들었습니다. ​ 그들이 소통하려고 했던 방법은 언어이기 전에 형상을 담은 그림문자였습니다. ​ 이집트의 상형문은 여러 부호를 한 줄로 늘어놓은 모양이며 글꼴의 형성 초기 단계부터 이미 그리기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상형문은 모양 자체를 넘어 새로운 공간 개념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시도였습니다. ​ 올해는 눈 구경하기가 어려운 겨울입니다. 그래도 겨울답게 영하를 오르내리고 있는 추운 날씨 속에 방학을 맞아 어디론가 기행을 나서고 싶은 마음을 다잡으며 데스크에 앉아 원고정리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다. ​ 날씨가 춥다 보니 문득 더운 나라가 그립던 차, 과거의 기행 중 덥기로 악명 높았던 이집트를 떠올리며 10년 전의 이집트기행문을 펼쳐봅니다. 중동으로 향하는 저가 항공의 플라이두바이(Flydubai) FZ183편에 우리 일행은 8월의 무더운 여름날 22시 55분 두바이에서 이집트의 룩소르로 향하는 여름밤 비행기에 올랐다. 새벽 2시 무렵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 예정이다. ​ 공항 활주로에 내려 트랩을 걸어 내려오며 푹푹 찌는 더운 바람에 실려 퀴퀴하고 텁텁한 이집트만의 이국적인 냄새가 고고한 역사의 도시를 실감케 한다. Canon EOS 5D Mark II 1ㅣ50 F2.8 필자는 앙크수나문(Anck-Su-Namum)과 세티 1세의 총애를 받던 승정원 이모탭(Imhotep)의 금지된 사랑, 그리고 미이라와의 사투를 그렸던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영화 ‘미이라’를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 또한 프랑스 출신 이집트학 학자인 크리스티앙 자크(Christian Jacq)의 장편소설 ‘람세스’를 읽고 깊이 감동받았으며, 영국 대영박물관을 비롯해 여러 곳의 전시회에서 마주했던 이집트의 유물전의 잔상들이 남아있습니다. ​ 이로 인해 필자의 기억을 따라 그렸던 이집트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만큼 퀴퀴한 냄새를 만들어내고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하곤 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 힘든 기행을 어떻게 다녔는지 신기하기도 합니다. ​ 이집트 기행을 다녀온 후 이듬해인 2011년 이집트는 반정부시위가 열리고 이후 유혈사태에 이르게 되어 여행금지국이 되었던 적이 있었고, 몇 년 후에는 우리가 이용했던 플라이두바이(FZ/Flyduvai)항공이 러시아 남부지역 로스토프나도우공항(ROV/Rostov-on-Don Airport)에서 비와 강한 바람이 부는 악천후 속에서 착륙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추락하는 사고도 있었습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400 F7.1 룩소르 [Luxor]는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660여 km 떨어진 나일강(江)변에 위치하며 룩소르신전과 카르낙신전 왕가의 계곡이 있습니다. 룩소르신전은 제18왕조의 아멘호테프 3세가 건립하고 제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증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250 F8 현재 남아있는 고대 이집트의 신전 가운데 최대 규모인 카르나크 신전은 룩소르 신전과 매우 가까운 3km 지점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기원전 2000년부터 건립을 시작하여 역대 왕에 의해 증개축이 되풀이되어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전은 신왕국 시대부터 1,500년 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 걸쳐 건립된 10개의 탑문 제19왕조의 창시자 람세스 1세로부터 3대에 걸쳐 건설된 대열주실 제18왕조의 투트모세 1세와 오벨리스크 람세스 3세 신전 등이 있습니다. 특히 높이 약 23m의 석주 134개가 늘어선 대열주실은 너비 약 100m, 안쪽 깊이 53m로서 안쪽의 하트셰프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와 함께 고대 이집트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320 F9 기행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2010년 8월 21일 섭씨 50도의 이집트를 찾았다. ​ 500리터 생수 두 병을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얇은 스카프로 얼굴을 돌돌 말아 가린 후 카메라 두 대를 어깨에 올리고 버스에서 내리면 마치 헤어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이 내 얼굴을 향하고 있는 듯 뜨겁고 따가운 열기가 숨통을 죄어온다. ​ 말이야 찬란한 문명의 빛 이집트와 그리스를 통해 본 공공디자인기행이었지만 이러다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 로컬가이드는 우리 일행에게 2~3일 전에는 52도까지 올랐는데 지금은 그나마 시원해져서 다행이라고 격려합니다. ​ 숨막히는 더위의 이집트, 찬란했던 이집트문명과 파라오의 영광이 고스란히 간직된 유물에서 공공디자인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문명의 오딧세이로 명명되는 이집트기행의 첫번째 키워드로 소통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40 F3.2 소통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통의 수단은 목소리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말[Speaking]의 역사는 점차 체계적인 틀을 갖춘 언어[Language]로 발전하게 됩니다. ​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사회적이라는 의미는 단순히 집단을 이루어 사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은 떼를 지어 사는 개미나 짐승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단지 함께 모여 있어야 각각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는 하나의 생존 법칙에 의해 모여 사는 것입니다. ​ 하지만 인간은 동물과 달리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닙니다. 그 속에는 지성과 감성이 공존하고 다양한 사유를 통해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은 인간의 능력은 공동체라는 틀 안에서의 소통을 통해서만 길러지는데 우리가 즐겨보는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사랑과 배신의 감정, 다양한 책을 통해 접하는 지식과 성찰 등이 모두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에 가능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정이라는 소집단에서 생활을 시작합니다. 가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관계를 경험하면서 자아가 생성되고 이후 인간은 성장함에 따라 개인 간의 소통을 넘어 집단생활에서도 소통의 힘을 발휘하게 되며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고라(광장)에서 다양한 토론을 거쳐 의사를 결정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의회라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고, 민주주의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 그러나 사람의 말은 수많은 사람에게 똑같이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을 전승하기에도 시간적 육체적 어려움이 따랐고 그래서 문자[Text]가 탄생하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파피루스나 한지에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면서 소통을 기록하게 되는데 문자는 인간의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후대에 전하게 되며 또한 보다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 Canon EOS 5D Mark II ㅣ1/250 F-5.6 이집트인들도 소통을 위한 무엇인가를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했을 것이며 그러한 결과들을 우리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갑골문과 상형문은 그 발생지가 심상치 않다는 점외에도 닮은 점이 많아 지금도 둘의 연관성에 대한 호기심의 질문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적어도 4,0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 그중에서도 가장 발전된 지식과 정보를 다루었던 사람들은 경제와 정치의 영향력 측면에서 리더 그룹에 속했는데 그들이 소통하려고 했던 방법은 언어이기 전에 형상을 담은 그림문자였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은 여러 부호를 한 줄로 늘어놓은 모양이며 글꼴의 형성 초기 단계부터 이미 그리기의 수준을 넘어서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상형문은 모양 자체를 넘어 새로운 공간 개념을 찾아내려는 인간의 시도였습니다. ‘성스러운 문자’상형문은 모양과 동시에 발음을 나타내기 위한 표음부호로도 사용되었고 이후 자연스럽게 표음문자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갑골문은 인간이 가진 ‘직관’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점, 상형문은 인간이 가진 ‘논리적 사고’의 존재를 인식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 이렇게 보면 결국 ‘직관’과 ‘논리’로 나뉘는 동서양의 문화적 특성이 글꼴을 놓고 고민하던 원시 시대부터 서로 다른 싹으로 자라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이후 수천 년을 이어 내려가게 된 문자의 틀이 이미 잡혀있던 셈입니다. 동서양의 한자가 덩어리로서의 그림 글꼴이라는 것과 알파벳이 풀어쓴 표음부호라는 서로 다른 문자의 정체성은 이렇게 초기 단계에서부터 드러났습니다. Canon EOS 5D F-5 1/100s 기원전 8,000년 경, 이른바 ‘신석기 혁명’으로 문화를 건설하기 시작한 인류는 기원전 3,000년 경 도시를 건설하고 문자를 사용함으로써 문명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문명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등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기원전 2,000년 경이 지나 지중해와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기원전 1,100년 경, 에게 문명의 몰락 이후 도시가 파괴되고 문자가 사라졌던 ‘암흑시대’를 지나, 그리스인들이 알파벳을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800년 경의 일입니다. 알파벳은 처음부터 그리스인의 창작물은 아니었고 동부 지중해 연안에 있던 페니키아 문자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합니다. ​ 지중해 동부 지역에 비블로스, 시돈, 티루스 등의 도시국가를 만들고 지중해를 무대로 활발한 교역 활동을 펼쳤던 페니키아인들은 상인이었을 뿐 아니라 선진 문명을 서양에 전달하는 문명의 전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활동으로 페니키아 문자가 자연스럽게 그리스로 전해졌고, 이후 모음이 없이 자음만 있던 문자를 그리스인들이 변형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모음을 표기하기 위해 아랍어 문자의 일부 자음인 A(알파), E(엡실론), O(오미크론), Y(윕실론)을 빌려왔으며, I(이요타) 등은 기존의 문자를 변형해 사용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어 알파벳 24개 (자음17개, 모음 7개)가 완성되었습니다. ​ 알파벳의 사용으로 지식의 대중화가 가능해졌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사물이나 추상적인 관념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자는 성직자나 귀족 등 소수의 전유물이었습니다. 한자를 알려면 적어도 1,000자, 메소포타미아의 서기들은 600자 이상의 설형문자를 알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문자학자들은 알파벳의 발명이야말로 지식의 대중화를 가져온 혁명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합니다. 알파벳을 통해 대중을 대상으로 한 교육이 가능해졌고, 다양한 소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 Canon EOS 5D F-6.3 1/160s - 2010년 8월 이집트 룩소르에서 편집인 신왕국 시대의 제18대 왕조에서 제20왕조까지의 왕들의 묘소로 만든 왕가의 계곡과 룩소르신전을 돌아본 후 우리 일행은 초경량 항공기인 MS356편을 이용해 17시 50분 룩소르를 출발하여 이집트의 수도인 카이로를 향한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오리엔탈(Oriental)+유럽(Europe)의 문화가 공존하는 자유로운 질서의 도시 홍콩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13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 Canon EOS 5D F-13 1/30s 일찍이 서구 문명이 자리 잡은 곳이라 마음의 부담감이 없으며, 여러 가지 문화가 있으며 특히 영국을 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영국의 문화와 한가로이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며 홍콩에 살고 있는 지인이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 2층 버스 및 노면전철의 전면광고를 통해 움직이는 광고가 오히려 홍콩만의 매력 있는 도시공간으로 기억되며 그곳에서는 번잡함 속에서의 자유로운 질서와 복잡함 속에서도 여유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제 시위가 막을 내리고 예전처럼 평화롭고 자유로운 질서가 정착되길 기도합니다. ​ Canon EOS 5D F-2.8 1/200s "홍콩 시위가 장기화되면서 국제사회가 우려하고 있습니다. 홍콩의 영역 내에서만 국가의 입법, 사법 집행 관할권을 행사할 수 있는 속지주의에서 발단되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홍콩과 중국의 역사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840년 시작된 아편전쟁으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당시 중요한 식민 무역항 역할을 했으며 이후 국 제 금융 중심지가 되기도 합니다. ​ 1997년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반환된 이후 하나의 국가 안에 두 개의 제도가 공존한다는 ‘일국양제(一國兩制)’와 홍콩인에 의한 홍콩의 통치라는 ‘항인항치(港人治港)’의 고도자치제도(高度自治制)가 유지되어 왔습니다. ​ 홍콩 반환 시 50년 간은 현 체제를 유지한다는 ‘50년 불변(50年不變)’도 보장되고 있습니다. ​ 영국적인 생활문화에서처럼 빵 문화와 밀크티가 보편적으로 생활화되어 케이크, 에그타르트, 스콘, 애프터눈 티, 빅토리아피크, 빅토리아 하버, 맥레호스 트레일, 2층 버스, 트램 등 교통수단과 낯익은 곳곳의 장소에서 영국 양식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 영국식 호칭으로 불리는 2층 건물(Centre) 엘리베이터(Lift) 지상층(Ground Floor) 등 오리엔탈과 이국적인 유럽풍의 감각적인 두 모습의 조화는 이를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 홍콩에 빠질 수 없는 자랑스러운 건축물로 홍콩센터, 우주박물관, 예술관, 시계탑,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호텔 건물들이 저마다 감각을 자랑하며 조화를 이루어 멀리서 바라보는 홍콩의 낮과 야경은 우아함과 불빛에 감탄을 자아내게도 합니다. ​ 상점들과 대형 쇼핑몰이 꾸준히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변화 속에 홍콩은 매번 반복되는 시간 속에 본연의 중국 모습과 잘 어울리며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습니다. ​ 서양문화에 일찍 개항하고 중국 본연의 모습이 배어있는 역사를 지닌 홍콩, 마카오, 칭다오, 상하이 등의 도시는 서양의 건축문화와 함께 혼합된 문화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Canon EOS 5D F-7.1 1/200s "마치 물감통을 펼쳐둔것처럼 현란한 색채의 도시 홍콩은 전체 면적 가운데 임지가 21%, 목초지와 관목 지역이 50%, 경작지와 양어장이 9%를 차지하여 토지자원이 매우 부족한 상태로 산을 개간하고 바다를 메워 육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Canon EOS 5D F-4 1/125s 담수자원도 매우 열약하여 다란융[大榄涌]과 촨완[船湾] 등지의 대형 저수지에 모아둔 빗물에 의존하였으나 공업 및 일반 용수로 사용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물에 대한 인식이 깨끗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홍콩인들은 음식 문화에서 허락할 수 있는 습관들을 가지고 있는데 식사 전에 뜨거운 물이 담긴 그룻에 각자 놓인 수저와 젓가락을 담아 휘저으며, 개인위생 상태를 확인하여 식사를 시작합니다. ​ 마시는 물 한잔도 소중히 여기는 홍콩인들은 맛과 멋을 느낄 수 있는 차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시내 중심가의 수 많은 유명 호텔의 라운지에서는 오후가 되면 홍콩시민들이 티를 즐기는 모습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 다양한 방식으로 홍차를 마시는데 홍차만 진하게 우려내어 마시는 것과는 달리 홍콩은 오랜 세월 영국의 지배를 받아오며 영국의 다양한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했지만 홍콩식으로 혼합되어 독특한 양식으로 발달된 것들도 많다고 하는데 대표적인 예로 따뜻한 우유를 타먹는 밀크티를 홍콩사람들은 즐겨 마신다고 합니다. ​ 홍콩에 살고 있는 지인은 일찍이 서구 문명이 자리 잡은 곳이라서 마음의 부담감이 없으며 여러 가지 문화가 있으며 특히 영국을 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영국의 문화와 한가로이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좋다며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Canon EOS 5D F-9 1/500s 복잡한 골목길에 들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사람들의 행렬에 이끌려 가다보면 에스컬레이터를 만나게 됩니다. 홍콩 정부에서 건설한 교통체계로 홍콩 센트럴(中环, 중환)과 미드레벨(半山区, 반산구)을 잇는 다수의 에스컬레이터 및 무빙워크로 센트럴 지역과 주변 거주 지역의 교통 체증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1987년에 제시되어 1994년 10월 15일에 개통된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입니다. ​ 시내 주변의 쇼핑몰과 소호거리가 잘 연결되어 있는데 총길이 800m로 출발지에서 종착지까지 소요시간은 20분이며 아침 출근시간인 오전 6시에서 10시까지는 에스컬레이터가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고 출근시간이 지나면 오전 10시20분부터 밤12시까지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로 바뀌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옥외 에스컬레이터로 헐리우드 로드와 캣스트리트, 만모사, 소호거리를 지나가게 됩니다. Canon EOS 5D F-6.3 1/250s 한때 세계적으로 주목을 끌었던 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이되기도 한 이 영화는 내용보다도 1995년 당시 그 시대에 파격적인 영상미와 아름다운 화면과 연출로 많은 화제를 모았던 작품으로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어” “감정이 풍부한 수건” 등 통통 튀는 대사와 마마스 앤 파파스의 명곡 ‘캘리포니아 드리밍(California Dreaming)’을 배경음악으로 세기말 신세대들의 감정적 반향을 불러일으켜 홍콩을 잘 아는 사람들 사 이에서는 지금도 사랑받는 장소로 자주 찾는다고 합니다. ​ 홍콩에 밤문화의 즐길거리중 하나로 ‘란 콰이퐁’ 소호거리는 골목들에 즐비한 아기자기한 유럽풍 스타일 샵들과 각종 음식점, BAR, 레스토랑 골동품 현지분위기가 물씬 나는 상점들이 모여있으며 쇼핑이 끝난 관광객들과 홍콩시민들이 퇴근길에 지나가게 되는 거리입니다. ​ 인산인해인 골목길을 들어서면서 때로는 옆걸음으로 때로는 기다렸다 통행하는 좁은 골목길은 필자에게도 인상 깊게 기억되어 있습니다. Canon EOS 5D F-9 1/320s "독일의 공습에 건물의 앞모습만 남아 사연 많은 홍콩의 시내를 밝히는 마법처럼 아름다운 성바올 세인트폴 대성당 인근은 화려한 밤 조명과 레이져 쇼가 펼쳐지는 홍콩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 섬세한 프레스코화 양식의 건축물, 조화로운 계단과 광장은 관광객들로 북적이지만 기다란 계단에 앉아 어느 누군가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여유로움이 생기는 평화로운 장소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이 식민지배를 끝내고 마카오를 중국으로 반환할 때 자국에서 가져온 돌을 깔아 만들었다는 물결무늬 모자이크 노면은 우연중에 건축물과 상점에서 눈길을 옮겨주는 재미있는 관광자원이 되기도 합니다. ​ 밝은 하늘아래 연노랑 건물과 진초록 성당이 포르투갈의 지배를 오래 받아서인지 아직까지 많이 남아있어 규모가 그리 크지 않지만 아기자기한 광장 주변에 남아 유럽양식의 건축물들이 장엄한 느낌과 분수와 벤치 주변의 까페들과 어우러져 다양한 축제분위기를 연출시켜며 이색적인 풍경들을 연출하기도 합니다. ​ 홍콩은 150여 년간 영국의 통치를 받으면서 서구의 문물과 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 특히 서구식 자본주의에 기초한 상업 금융 등 서비스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였고 주민의 상당수가 이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 사회체제와 제도는 서구화된 반면 주민들의 의식 구조와 가치관은 동양적인 요소가 많이 잔존해 있습니다. 사회보장제도와 공공주택 임차제도가 잘 구비되어 있긴 하나 빈부격차가 비교적 크며 소득대비 세금부가가 비중이 큰 편으로 주택 가정문화가 빈약하게 발달하여 개인 소유의 주택보유율이 적다고 합니다. ​ 홍콩의 고층빌딩들은 숲속을 연상케 할 만큼 골목마다 빼곡히 들어서 있습니다. 땅이 좁고 인구는 많아 대부분의 고층건물이 주상복합으로 상업과 주거공간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 주상복합과 임대주택, 다세대 주거문화가 발달하였으나 주거공간이 비좁아 실내에 세탁물을 널 수 있는 다용도 공간이 없는 구조가 많아 옷가지와 빨래 등을 널어 창문을 열어두고 지내는 모습들을 손쉽게 볼 수 있습니다. Canon EOS 5D F-10 1/500s 외식문화가 발달하여 집에서 직접 요리하는 음식보다 길거리의 로컬음식들과 음료들을 다양하고 저렴한 가격에 접할 수 있는데 이러한 환경으로 인하여 길거리에 홍콩인들의 생활패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스트릿거리가 활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Canon EOS 5D F-3.2 1/200s 홍콩은 풍수지리에 관련하여 민감하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개인의 길흉화복은 물론이고 상업적인 용도로도 풍수를 거론하기도 합니다. ​ 지역과 장소에 영향을 주는 자연 에너지의 흐름이 좋으면 부와 건강을 가져다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풍수가 건물 디자인을 결정하고 바꾸는건 기본이며 일부러 건물 주위에 물이 흐르게 하거나 어항을 만들기도 하고 빌딩 입구에 의미있는 사자상을 세우기도 한다고 합니다. ​ 풍수지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는 홍콩은 미신적인 예로 홍콩의 다리 밑 해피밸리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싫어하거나 저주하고 싶은 상대를 두고 종이를 태우면 저주가 내린다고 믿기도 한다고 합니다. ​ 중국 땅이라고 하지만 서구 문명이 일찍이 자리 잡은 곳이라서 서양의 느낌이 많은 홍콩은 여러가지 멋진 문화가 있지만 굳이 영국을 가지 않아도 즐길 수 있는 영국의 문화가 묻어나 있으며 홍콩의 밤은 골목골목 들어선 유럽풍 레스토랑과 BAR, 골동품 상점 등이 어우러져 소통의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Canon EOS 5D F-6.3 1/160s 철저한 자유시장 경제체제, 3차 산업 위주의 산업구조와 높은 대외의존도, 아시아의 국제금융 중심지인 홍콩의 공항에서 처음 만나는 홍콩의 공공디자인 시각매체들은 시인성과 주목성을 잘 나타내고 있었으며 기둥구조물에 통합 설치된 곡선형 안내정보대와 고채도의 픽토그램으로 주목성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 공항 내 특성에 맞게 삼각형 폴형의 방향유도 사인으로 여러 방향에서 정보 확인이 가능하도록 배려하고 빠르게 이동하는 통로공간에 이용자의 동선을 고려하여 사선으로 배치한 광고사인 시스템이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 특히, 노후된 건물외부나 구조물을 가리는 넓은 판형의 옥외광고물들은 홍콩에서만 볼 수 있는 특색 있는 광경으로 건축물의 파사드에 타공판넬을 전면에 마감하고 사인시스템을 배치하여 노후된 건축물의 미관개선 및 홍보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며 2층 버스 및 노면 전철의 전면광고를 통해 움직이는 광고가 오히려 홍콩만의 매력 있는 도시공간으로 기억되며 그곳에서는 번잡함 속에서의 자유로움과 복잡함 속에서도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이제 그만 시위가 막을 내리고 예전처럼 평화롭고 자유로운 질서가 정착되길 기도합니다."

이탈리아 베네체아[VENEZIA]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12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 ​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Canon EOS 5D F9 1/500s 베네치아[Venezia]는 영어로 베니스(Venice)입니다! ​ 물의 도시 베니스! 절묘한 예술품 같은 창조물이 가득한 도시 베니스! 세계를 장식하는 보석상자 베니스! ​ 그토록 아름다운 베네치아가 최근 반백 년 만에 대홍수로 수위가 160cm에 이르게 올라 베네치아의 대명사인 산마르코 광장이 폐쇄되고 학교가 휴교령이 내리고 시민들이 재해를 당했습니다. 세계의 문화재 또한 비상입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의 문화재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지켜야 할까요? 우리 인류의 기억과 추억이 담겨있는 베니스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Canon EOS 5D F/11 1/500s 아드리아해의 반짝이는 햇살 아래 흔들리는 곤돌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카페의 야외데크에 앉아 에스프레소 한 모금을 목에 적십니다. ​ 2002년 월드컵이 열린 다음해 필자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커피의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큼 달콤 씁쓸한 커피의 매력에 빠져들 무렵 유럽문화의 아름다움에도 함께 취했던 시절이었습니다. ​ 16년 전인 2003년과 2008년 두 차례 베니스를 경험했습니다. 당시 유럽은 필자에게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하고 정교한 건축물과 가는 곳마다 역사적 배경이 되는 곳들 특히 전 세계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던 아드리아해의 보석 베네치아는 유럽 특유의 낭만이 배가 되어 오랜 세월 동안 가슴속에 기억되는 곳입니다. ​ Canon EOS 5D F/10 1/500s 베네치아[Venezia]는 영어로 베니스(Venice)로 불리는 이탈리아 베네토주(州)의 주도(州都)이며 ‘물의 도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니스를 묘사하고 찬미하는 데는 장르가 없으며 시대 또한 초월합니다. ​ Canon EOS 5D F/8 1/500s 물의 도시 베니스! 절묘한 예술품 같은 창조물이 가득한 도시 베니스! 세계를 장식하는 보석상자 베니스! 괴테는 모든 것이 풍요롭게 반짝인다고 표현했으며 사랑으로 만들어진 베네치아라고도 일컬어지며 라틴어로 ‘계속해서 오라’는 의미를 가진 지구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도시! ​ 두 눈을 감으면 아드리아해의 바람이 솜털 위에 살랑이며 노젓는 곤돌라가 음악 소리로 들려옵니다. 또한 화려한 가면무도회가 열리고,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축제가 열리기도 합니다. Canon EOS 5D F/11 1/500s 상업과 예술의 번영이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향락과 은밀한 관능의 세계로 바라보기도 했던 베니스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도 있습니다. ​ 여러 자료들을 찾다 보니 1647년에 오픈했다고도 하고 1720년에 오픈되었다고도 알려진 산마르코광장의 카페 플로리안에 카사노바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탄식의 다리를 건너 감옥에 있다가 탈출하여 도망하는 과정에서 평소 즐겨 찾던 이 카페에 들려 커피를 마신 후 플로리안의 커피 맛은 변함없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는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 베네치아의 역사는 567년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이 만(灣) 기슭에 마을을 만든 데서 시작됩니다. ​ 베니스는 원래 바다 늪지대였는데 베니스에 이주한 사람들이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여러 문헌 자료의 평균값으로 이야기하면 약 110만 개 정도의 말뚝을 박아 110여 개의 섬을 조성하고 섬과 섬을 400여 개의 다리로 연결하여 만든 인공운하의 도시라고 합니다. ​ Canon EOS 5D F-10 1/500s - 베니스의 건물에 창문이 많은 것은 건물의 하중을 줄여 가라앉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고도 합니다. 베니스는 인구 15만 정도의 작은 도시로 1,000년을 지속하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동지중해와 아드리아해의 해상권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로는, 아드리아해의 서쪽 해안에 위치하여 유럽 중부대륙과 연결되며 동구와도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지리학적 접근성이 주요했다고 합니다. ​ 또한 인구 15만의 베니스시민들은 자력 생산기반이 없이는 지속가능성의 생존이 없다는 것을 일찍이 깨우치고 해외무역상인이 되어 상선대를 조직하여 지중해를 넘어 인도양까지 원거리 무역을 하였습니다. ​ 고기를 좋아하는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이윤을 남기고향신료를 판매하며 부를 축적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다른 한편으로는 아드리아해 달마시아 지역 해변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적들이 출몰하여 베니스 상인들의 상선을 약탈하는 일이 심해졌고 이를 계기로 부유한 베니스는 단시간 내에 동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함대를 구축하게 되었고 베니스 함대는 달마시아 해적을 소탕하고 나아가서 비잔틴 황제에게 동지중해와 아드리아해를 지키는 재해권을 위임받아 십자군 원정을 주도했다고도 알려져 있습니다. ​ 베니스는 아름다운 산마르코 광장과 미로 같은 수로 사이의 건축물과 또 미로 같은 골목길들 또한 재미있는 볼거리 관광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는 단연 산마르코 광장입니다. ​ 그곳에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산마르코 대성당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산마르코 대성당은 성인 마르코의 유골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와 도시의 수호성인으로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10세기 후반에 일부가 불에 소실되었으나 11세기에 대부분 복원되었고 일부는 13세기와 15세기에 증축한 것으로 산마르코 대성당은 중세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 건물이 웅장하고 뛰어난 예술품으로 장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양과 서양 건축의 장점을 조화롭게 구성하여 베네치아 양식이란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었는데 웅장하면서도 화려하여 훗날 서유럽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Canon EOS 5D F-11 1/500s 산마르코 광장과 주변에는 독특한 건축 양식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많은데 박물관으로 개방되고 있는 두칼레궁전은 베네치아 고딕 양식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두칼레궁전과 감옥 사이에는 운하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있는데 죄인들이 감옥에 갈때 이 다리를 건너며 탄식했다고 해서 ‘탄식의 다리’라고 이름 붙여져 있습니다. ​ 산마르코 광장 남서쪽인 대운하 지역에는 베네치아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이 있고 1630년 베네치아에 흑사병이 유행하면서 도시 인구의 약 20%에 해당하는 4만 7,000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흑사병으로부터 목숨을 보전한 시민들이 성모마리아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이 성당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Santa Maria della Salute]은 56년 동안 지어졌는데, 팔각형의 바닥 위에 세운 커다란 돔이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 그 밖에 산 조르조 마조레 성당(San Giorgio Maggiore)은 르네상스와 신고전주의 양식이 멋진 조화를 이룬 건축물입니다. Canon EOS 5D F-10 1/500s 아름답고 신비로운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이야기가 많습니다. 종횡무진 희대의 바람둥이 이야기를 그린 2006년 개봉작 카사노바와 폴 슈레이더 감독 1990년 작품 ‘베니스의 열정’은 베네치아라는 곳에선 초현실적인 일도 별로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느낌의 모티브로 구성하고 있습니다. ​ 한편,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2002년작 ‘월요일 아침’에서는 월요일 아침이면 공장에 출근해야하는 어느 노동자가 갑자기 연장 가방을 던지고 어릴 때부터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의 화구를 들고 고향을 떠나 베네치아로 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 또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의 1954년 작품 ‘센소’는 베네치아의 푸른 밤을 이보다 잘 찍은 경우는 없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5대 희극 중 하나인 ‘베니스의 상인’은 인종 차별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잔인한 복수심과 사랑과 우정을 위해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거래를 하는 모험을 그린 작품으로,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도시 베니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 베니스의 운하와 건축물을 배경으로 주옥같이 아름다운 사랑과 전설들이 영화와 소설로 이야기됩니다. Canon EOS 5D F-10 1/500s 겨울철에는 유럽의 가장 유명하고 매혹적인 카니발 중 하나인 베니스 가면 축제(Venice Carnival)가 열리는데 이 축제는 전통적인 가장무도회와 정교한 18세기 복장을 부활시킨 것으로 한 해 동안 이 도시의 가장 하일라이트로 시내 중심가인 산마르코 광장(St Mark's square)과 극장 등에서 뮤지컬, 연극, 곡예, 댄스 공연이 펼쳐집니다. ​ 축제 기간에 등장하는 가면과 의상은 ‘세계 유일의 가면 축제’로 찬사를 받을 정도로 그 독특함을 지니고 있으며, 이 기간 동안에는 1백만 명에 가까운 전 세계의 관광객이 몰려들어 베니스의 미로와 같은 좁은 골목길은 인파들로 넘쳐납니다. ​ Canon EOS 5D F-10 1/500s Canon EOS 5D F4 1-1600s 그토록 아름다운 베네치아가 최근 반백 년 만에 대홍수로 수위가 160cm에 이르게 올라 베네치아의 대명사인 산마르코 광장이 폐쇄되고 학교가 휴교령을 내리고 시민들이 재해를 당했습니다. ​ 세계의 문화재 또한 비상입니다. 영국의 BBC방송에 따르면 전형적인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로 전 지구적인 해수면 상승과 바다 위에 세운 베니스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어서 피해가 가중된 것이라고 합니다. ​ 실제로 필자가 두 번째 방문했던 2008년에도 산마르코광장의 곳곳에 물웅덩이들이 많았으며 점점 가라앉고 있어 한국에 돌아와 지인들과 제자들에게 아름다운 베니스로의 여행을 권장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 오늘날 대홍수는 비단 베네치아만의 재해가 아니라 인류의 재해이며 어쩌면 재앙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수위가 160cm를 넘으면 베니스의 70% 안팎이 침수될 수 있으며 지난 홍수의 최대 수위는 180cm이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이 도시의 문화재를 어떻게 보호하고 지켜야 할까요? 우리 인류의 기억과 추억이 담겨있는 베니스가 제 모습을 되찾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투우의 발상지 스페인 - 론다 (RONDA)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11

투우의 발상지 스페인-론다[Ronda] ​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 Canon EOS 5D Mark II 1/250 F7.1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말라가주에 속해 있는 론다! ​ 높이 750m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거친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요새화된 도시! ​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는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 소설가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며 시인 릴케는 스페인에서 론다만큼 놀라운 도시는 없다며 꿈의 도시라고 예찬한다! ​ 론다는 투우의 발상지로 1785년에 건설한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에서는 지금도 매년 9월 최고의 투우 축제 코리다 고예스카(Corrida Goyesca)가 열린다! Canon EOS 5D Mark II 1ㅣ200 F7.1 에스파냐 안달루시아 자치지역 말라가주에 속해 있는 론다는 주도 말라가에서 북서쪽으로 약 120km 떨어져 있으며 면적 약 480.6 ㎢에 2018년 기준 약 47,000명이 살고 있는 높이 750m의 높은 산으로 이루어진 거친 산악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도시입니다. ​ 투우의 발상지 론다[Ronda]는 절벽에 세워진 작은 도시지만, 세비야와 톨레도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안달루시아의 농작물 산업의 부흥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 훗날 저널의 지면을 통해 소개할 예정인 스페인 광장으로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의 배경이 되어 알려지기도 했던 1929년에 열린 에스파냐·아메리카 박람회장으로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Aníbal González)가 만든 반달 모양의 광장으로 강이 흐르고 광장 쪽 건물 벽면에는 에스파냐 각지의 역사적 사건들이 타일 모자이크로 묘 사되어 있는 세비야 에스파냐 광장[Plaza de España, Seville] 그리고 로마 시절부터 톨레툼이란 이름으로 서고트 왕국의 수도였던 유서깊은 도시였으며 천혜의 자연 요새로 인해 이베리아 중부 고원 메세타의 최고 핵심 전략 거점이었던 중세의 고도 톨레도 그라나다와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을 통해 이슬람 문화와 스페인의 가톨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스페인광장으로 불리는 쁠라사데 에스파냐(Plaza de Espana)광장이 있는 1929년 건축된 제일 화려하고 아름다운 스페인 광장이 있는 세비야를 돌아본 후 우리 일행은 버스로 약 2시간을 달려 론다에 도착하게 됩니다. SAMSUNG SM-G906K 1ㅣ427 F2.2 론다는 기원전 6세기경 켈트족이 세웠으며 이후 고대 페니키아인이 규모를 키웠다고 알려져 있으나 도시의 시초는 기원전 3세기경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정치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Publius Cornelius Scipio Africanus)가 건설한 요새화된 도시입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125 F5.6 이 작은 도시는 투우의 발상지로 세계에 알려져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1785년에 건설한 에스파냐에서 가장 오래된 투우장 중 하나인 론다 투우장(Plaza de Toros de Ronda)에서는 지금도 투우 경기가 열리고 있습니다. ​ 특히 론다의 누에보 다리(Puente Nuevo)는 유명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습니다. ​ 18세기에 카를로스 3세 왕이 만든 누에보 다리는 스페인 남부의 론다의 구시가지(La Ciudad)와 신시가지 (Mercadillo)를 이은 세 개의 다리 중에 마지막에 만들어졌으며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 1735년 펠리페 V에 의해 처음 제안되어 8개월 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무너져서 50여 명의 사상자를 내기도 했으며,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건축가는 José Martin de Aldehuela 이였고, 책임자는 Juan Antonio Díaz Machuca로 기록되어있습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100 F4.5 건축 당시 타호 협곡(El Ta jo Gorge)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는데 거대한 돌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획기적인 기계들을 고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다리의 높이는 98m에 이르며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실내는 과거 감옥과 고문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후에는 바[Bar]로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 론다가 높은 곳에 세워진 이유로는 옛날에 전쟁이 많았는데 방어하기가 좋았다고 합니다. 론다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주에는 높은 곳에 세워진 도시들이 많지만, 론다가 유명한 이유에는 누에보 다리와 미국 소설가 헤밍웨이와 독 일 시인 릴케가 사랑한 도시로도 유명합니다. ​ 헤밍웨이는 많은 날 이곳에서 휴가를 보내며 론다의 아름다움과 투우 경기에 대한 글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론다의 누에보 다리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 되기도 한곳이기도 하며 시인 릴케는 스페인에서 론다만큼 놀라운 도시는 없다며 꿈의 도시라고 예찬했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론다와 문학적 삶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번에는 투우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500 F10 인간과 짐승의 싸움은 스페인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것 같습니다. 특히 로마 시대를 그린 영화 중 ​ “내 이름은 막시무스 데시무스 마르디우스 북부군 총사령관이자 펠릭의 장군이었으며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신하였다. 태워 죽인 아들의 아버지이자 능욕당한 아내의 남편이다. 복수하겠다. 살아서 안되면 죽어서라도” ​ 의 명대사로 두 주먹에 땀을 쥐게 했던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에서도 그런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인간과 인간의 싸움도 있었고 인간과 짐승의 싸움도 있었습니다. ​ 사람들은 이러한 싸움을 보면서 즐기고 좋아했던것 같습니다. 당시 로마는 자금과 군사력의 막대한 힘을 발휘했는데 그러한 능력으로 유럽 대륙에는 없었던 코끼리, 악어, 사자, 호랑이를 로마까지 데려와서 싸움을 시키며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주었고 이것을 사람들이 즐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160 F6.3 이베리아반도는 그때 당시 히스파니아라고 불렀던 기록이 있습니다. ​ 영화 글래디에이터 초반부에 큰 전투에서 승전하여 황제가 왔을 때 막시무스라는 장군이 ​ “나는 충분히 로마를 위해서 싸웠으니까 집에 가고 싶다. 나의 집은 에메리타, 아우구스타 에메리타[Augusta Emerita]” ​ 라고 말하는데 그 도시가 오늘날의 메리다[Mérida]로 스페인 남서부 바다호스 주 중북부의 도시로 영화 속 밀밭에 올리브 나무의 저택이 바로 스페인 풍경입니다. ​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사람들이 “히스파노! 히스파노!”를 외치는데 히스파노[Hispano]는 스페인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영화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막시무스 장군의 아내가 검은 머리로 스페인 여자입니다. 이베리아반도에는 농부들이 올리브 나무와 포도 그리고 밀을 재배했으며 당시 스페인의 이베리아반도 히스파니아가 로마의 곡창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싸움 보는 것도 좋아하고 피를 보는 것도 좋아했었는데 로마처럼 그런 엄청난 비용을 들여 코끼리와 사자같은 동물들과 싸움을 하지 못하니 흔히 보이는 소를 많이 죽였었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에는 소 한 마리 죽이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젖소같은 그런 소가 아닌 힘이 굉장히 좋은 짐승입니다. ​ 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투우의 시초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한 배경으로 많은 기사와 군인들이 소를 많이 죽였었다고 합니다. ​ 전쟁에 나가기 위해 훈련의 방식으로 말을 타고 소를 피하며 창으로 소를 죽였는데 18세기에 카를로스 3세라는 굉 장히 지혜로운 왕이 당시 나라가 힘든 상황에서 좋은 아이디어를 내었는데 군인들이 훈련하면서 말을 타고 소를 죽이는 모습을 관중들이 볼 수 있도록 개방하고 관람료를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 더욱이 지혜로운 건 투우 한 번 할 때마다 돈을 받아 일부를 병자들을 위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군인들은 계속 훈련할 수 있었고 관중들은 즐기는 가운데 병자들을 구제하고 지원해주었으며 무엇보다 당시 단백질이 풍부한 소고기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훌륭한 아이디어가 시초가 되어 발전되며 투우사가 탄생하고 이것을 재밌게 만들기 위해서 말에서 내려서 소를 몰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스페인에서 투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400 F10 스페인어로 투우용 소[싸움소]를 또로 브라보(toro bravo)라고 부르는데 굉장히 힘이 좋고 덩치가 큰 소였다고 합니다. 투우 경기가 시작되면 투우장 문이 열리기 무섭게 화가 나서 뛰어다니는데 어떻게 그렇게 사나운 상태로 시작되는지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 첫 번째는 처음부터 그렇게 사납게 키운다고 합니다. 두 번째 투우 경기 전에 24시간에서 48시간 동안 밥과 심지어는 물도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짐승들은 굶기면 예민해진다고 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투우 영화에서 보면 소가 나올 때 목 부분에 노란 띠 빨간 띠를 하고 있는데 그 밑 부분에는 손가락만한 바늘이 꽂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파서 소가 사나워진다고 합니다. ​ "투우사가 화가 잔뜩 난 소를 몰기 시작합니다! 카포테라고 불리는 천을 사용하는데 처음에는 분홍색의 천을 사용하다가 마지막에 빨간색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왜 빨간색과 분홍색이냐를 두고 늘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소는 색상 구분을 못 한다고 합니다. 단지 카포테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것이고 투우사는 카포테를 사용해 소를 몰 수가 있습니다." ​ 투우 경기에서는 대부분 30분 이내에 소를 죽인다고 합니다. 소가 영리한 짐승은 아니지만,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속지 않아 위험해진다고 합니다. 투우 경기에 사용되는 또로 브라보(toro bravo)는 보통 어린 소로 어른 소는 600kg 넘어 투우사가 죽이기에는 무척 힘이 든다고 합니다. ​ 너무 힘이 좋고 거칠기 때문에 사람이 당해낼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640kg에 이르는 소하고 싸운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보통 529kg ~ 540kg이고 489kg는 작다고 한답니다. ​ 보통이 500kg 넘습니다. 500kg이 넘는 소하고 100kg도 안되는 투우사하고의 게임은 당시에는 충분한 즐길 거리가 되었나 봅니다. 투우 경기에서 투우사 말고 도와주는 기사가 있는데 소와 대치하고 있을 때 창으로 소의 등을 찔러서 피를 흘리게 한다고 합니다. ​ 피가 너무 많이 나지 않도록 반데리야라는 창을 사용해 계속 자극을 주다가 경기의 마지막에는 에스파다라는 긴 칼로 투우사가 소의 머리를 피하면서 정확하게 찌르면 칼이 심장까지 들어가서 마침내 쓰러지게 된다고 합니다. ​ 잔인하게 볼 수 있는 투우는 나라마다 오랜 역사에서 비롯된 문화로 스페인 사람들은 하나의 예술이라고 합니다. 론다와 투우를 사랑했던 헤밍웨이는 ‘투우는 예술가가 죽음의 위험에 처하는 유일한 예술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 스페인 사람들은 빨간색을 좋아합니다. 전쟁이 많아서 그런지 스페인 국기에도 빨간색이 있고 플라맹고 복장에도 빨간색이 있고 스페인 사람들은 그걸 보면서 올레! 브라보!를 외치며 좋아합니다. ​ 마드리드 투우장은 4월에서 10월까지 1주일에 1번씩 주일에 일요일에 하는데 론다 투우장은 1년에 딱 1번만 합니다. ​ 매년 9월 초에 론다에서 열리는 투우 축제를 코리다 고예스카(Corrida Goyesca)라고 하는 투우에 관한 최고의 축제인데 한 시즌에 제일 잘하는 투우사들 그리고 제일 큰 소들을 데리고 와서 제일 훌륭한 투우 경기를 보는데 그뿐만 아니라 고예스카라고 하면 고야 시대 18세기 말 19세기 초 그 전통 복장 우리 한국으로 치면 한복을 입고 투우를 보는 큰 축제가 열립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400 F10 투우장의 관람석은 그늘이 있는데는 비싸고 해가 내리쬐는 곳은 싸다고 합니다. 이유인 즉, 투우할 때 보통 6마리가 하는데 1마리에 30분이 걸리는데 3시간을 보게 되므로 여름날의 섭씨 40도에 이르는 햇빛을 받으면서 투우를 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론다 투우장은 1875년에 건축된 세계에서 제일 큰 경기장입니다. 세비야, 마드리드에도 투우장이 있는데 건물은 크지만, 경기장은 작다고 합니다. 세비야와 마드리드 투우장의 길이가 60미터인데 론다의 투우장은 약 6미터가 긴 66미터에 이릅니다. 론다 투우장은 소가 유리하다고 합니다. 투우사가 쥐가 나던지 말목을 삐었던지 부상을 당했을 때 도망치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 투우 경기가 시작되면 음악이 나오면서 어떤 사람이 간판을 들고 소를 소개하며 선수들처럼 소 이름을 말하고 누가 키웠는지 몸집의 무게는 얼마인지를 알려주며 투우가 시작되는데 투우사가 몰기 시작하는데 투우사의 경기방식에는 멋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소를 몰 때 다리를 움츠리면 안 된다고 합니다. ​ 500kg이 넘는 힘 좋은 소가 뿔을 세우고 앞으로 달려 드는데 그 무서움을 견디고 소를 모는 게 절대로 쉬운일이 아닐 것입니다. ​ 경기에서 투우사를 부상 입힌다든지 죽이게 되면 그 소는 풀어주고 몸값도 오른다고 합니다. 승리한 소에게는 새끼를 낳으라고 풀어주는데 한번 투우 경기에서 살아난 소는 다시는 경기장에 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 소가 배웠기 때문에 그 소는 경기에 아주 위험한 소로 풀어놓는다고 합니다. 또 다른 경우도 있는데 투우사도 잘하고 소가 너무 훌륭하고 좋으면 사람들이 인둘또[indulto] 라고 하는데요 인둘또는 살려주자는 뜻으로 로마 시대 때 검투사의 경기방식과 유사합니다. ​ 사람들이 인둘또 소를 살리자 하면 비긴 것처럼 투우사도 박수받고 소도 박수받고 그 소는 밖에 나가서 치료해주고 이긴 것처럼 두 번 다시 투우 경기를 시키지않고 살려준다고 합니다. ​ 하지만 대부분의 소가 죽게 되고 투우사가 정말 잘했다는 축하로 사람들이 투우장 올 때 하얀 손수건을 가져와 흔들어 주는데 이는 상을 주자는 뜻이랍니다. 투우사한테 상을 주는데 당연히 돈도 주겠지만 소의 귀를 잘라준다고 합니다. ​ 그보다 정말 잘했다 계속 사람들이 환호해주고 계속 흰 손수건을 흔들어주면 또 귀를 잘라 주었는데도 사람들이 환호하면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상으로 꼬리를 잘라준다고 하는데 매우 드문 일이며 꼬리까지 자르는 투우사들은 사람들에게 꽃도 받고 돈도 받으며 귀를 2개 자르거나 꼬리를 자른 투우사들만 사용하는 대문으로 퇴장한다고 합니다. ​ 대부분의 원형경기장과 마찬가지로 론다의 투우경기장도 원형 모양으로 설계되어 경기장 중간에서 박수치면 전체 객석에 다 들리게 됩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800 F10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역사와 전통의 명맥을 이어가며 이러한 역사는 문화가 되고 또 문화는 축제가 되며 세계인들을 불러 모으는 관광자원이 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은 도시재생과 뉴딜사업, 지역개발사업 문화적 도시재생사업 등 국정과제에 맞추어 다양한 자원의 발굴과 개발을 위해 힘을 쏟고 있습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과 론다의 투우경기장 같은 규모가 아닐지라도 인위적으로 급조하여 만들어지는 랜드마크의 선전 선동적 문화콘텐츠가 아닌 우리의 뿌리 깊은 역사와 전통 속에 자리한 소소한 것이 세계적인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 편집인

상하이 1편 - 타이캉루(泰康路) 티엔즈팡(田子坊)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10

채워져서 아름다운 감성공간 상하이 타이캉루 티엔즈팡 /정희정·김옥예 /도서출판미세움을 토대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상하이-1편 타이캉루[泰康路] 티엔즈팡[田子坊] ​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 상하이 한국문화원 자문위원 김 옥 예 국경없는 문화공동체 회원 Canon EOS 5D Mark II 1ㅣ100 F3.5 ‘한국의 역사 속에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세계적인 항구 도시이며 거대 중국의 경제와 문화를 대표하는 상하이, 상하이 타이캉루 ‘티엔즈팡’은 우리나라의 홍대 골목이나 삼청동, 소격동 혹은 인사동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상하이 타이캉루 티엔즈팡’을 살펴보며 우리의 도시와 농촌 마을들이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도시 혹은 마을이 만들어지길 기대한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200 F7.1 타이캉루 티엔즈팡은 상하이 주거건물의 특징인 스쿠먼 양식1)과 부티크, 레스토랑, 카페 등이 잘 어우러진 곳이다. ​ 1998년부터 예술 단지로 자리매김하다가 200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업공간, 예술공간, 주거공간이 융합되면서, 비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채워져 독특하고 정감 있는 창의적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 골목을 걷다 보면 다양한 공간들의 역사를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스쿠먼 양식의 상업공간과 소박한 주거공간을 보며 즐거워지는 이유는 공간 속에 인간의 삶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 1) 19세기 상하이 가옥의 양식으로써 중국 전통양식과 서양식이 뒤섞이며 만들어진 중국의 가옥양식. 옛 것과 새 것의 아름다운 조합! ​ 새로운 것을 수용하고 낡은 것을 거부하는 시대는 이제 지나간 것 같다. 낡은 것도 새로운 것과 잘 어우러져 또 다른 것을 생성하게 되니 말이다. 각종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상점들의 소품과 사인물들로 사람들은 다양한 상품을 구경하기 바쁘고 사진촬영에 여념이 없다. ​ 2010년의 상하이 엑스포(Shanghai Expo)를 계기로 확대된 이곳 티엔즈팡은 하루 3만여 명의 방문객이 드나들며 상하이에 가면 놓쳐서는 안 될 관광명소로 나날이 거듭나고 있다. 새로운 것과 옛 것이 함께 채워져 발전하는 이곳이야말로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문화예술의 요충지라 할 수 있다. ​ 무질서 속의 질서가 있는 이곳은 소통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이며, 금지와 허락이 공존하는 주거와 상업공간이기도 하다. ​ 이곳은 밤 10시가 되면 보안원이 보초를 선다. 거주하는 주민들의 잠자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해서다. ​ 과거 조상들이 지냈던 공간 속의 나를 보며, 또 앞으로 후대들이 지낼 모습을 떠올리면 이것이야말로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드는 타임머신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 "티엔즈팡(田子坊)의 유래" ​ 타이캉루는 티엔즈팡 한쪽에 있던 거리 이름으로 작은 길가의 시장이었다. 1998년 9월부터 타이캉루 길을 새롭게 포장하게 되면서 진흙투성이었던 대로가 몰라보게 새로운 모습으로 달라지게 되었다. ​ 정부의 지지를 받으면서 타이캉루는 다푸치아오(打浦桥)구역의 기능적 위치를 근거로 하여 특색 있는 대로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고 1998년 12월 28일 문화발전회사가 타이캉루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상하이 ‘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 이를 시작으로 유명한 천이페이(陈逸飞), 얼동지앙(尔冬强), 왕지에인(王劼音), 왕지아쥔(王家俊) 등의 예술가들과 예술·공예 상점 등이 타이캉루로 들어오게 되었고, 이곳은 점차 예술가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수 많은 사람들이 찿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60 F2.8 얼동지앙 스튜디오에서 매월 여는 가극과 음악회 등으로 인해 사람들로 넘쳐났고, 타이캉루 르티엔 도자기 회사는 국제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예술 전람회와 전시회 및 교류 등으로 세계적 도자기 예술계에 높은 명성을 얻었다. ​ 그리고 상하이의 독자적인 한 부류를 이루었던 대나무 조각 공예 회사는 상품의 판매가도 높일 뿐만 아니라, 판매시장도 광범위하게 넓히게 되었다. ​ 또한 타이캉루와 스난루(思南路: 길 이름) 입구의 골동품 상점은 골동품 소장자들을 끌어들였다. ​ 타이캉루 210번지는 ‘티엔즈팡’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중요 지역으로 변모하였고, 동시에 공장 건물들은 예술의 재구현으로 인해 다른 스타일의 작업실(Studio)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천이페이의 스튜디오는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스타일로 구현되었고, 실내의 벽난로는 장식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품위 있는 건축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엄동설한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불을 피워 놓고 벽난로 옆에서 커피나 홍차를 마시면서 창조적인 예술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 그것은 예술에 대한 영감을 떠올리기에 좋은 분위기다. 얼동치앙의 스튜디오는 공업혁명의 흔적이 엿보인다. 평상시에도 시동 가능한 기중기 두 대를 진열해놓았고, 천장은 수입 투광판과 현대적인 건축자재로 재구현되었다. 어떤 물품들은 장인들의 손을 거쳐 또 다른 상품으로 완성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생활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충만한 예술적 생산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 천이페이 선생이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담아낸 ‘동방의 작은 조각’은 파리의 세계조각전시회에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참가한 화교(華僑)의 작품이다. ​ 당시 이것은 일종의 창작과 동시에 새로운 작품의 탄생이었다. 그리고 미국의 도자기 예술가인 지미(杰米)는 도자기 공방을 열고 많은 외국인들을 끌어들여 도자기 기술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였다. 홍콩의 유명한 도자기 작가인 정이(郑祎) 또한 타이캉루 ‘락천도예관(乐天陶艺馆)’을 만들어 국제 도자기 교류에 앞장서고 있다. ​ 티엔즈팡 내의 5층 작업장은 공업 건물로 재건설되었다. 5,000평방미터 내에 10개국의 예술가 집단이 들어와 이곳에 설계실을 설립하였다. ​ 같은 공장 문 앞에는 10개의 다른 국기가 나부끼고 있으며, 이는 마치 국제예술박람회를 연상케 한다. 중국과 서양의 문화가 융합하며 타이캉루는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 시간이 흐르면서 타이캉루 길가에는 예술품과 공예품 상점이 40여 개나 자리 잡게 되었고, 작업실과 설계실도 20여 개에 이르게 되었다. 정부가 예술의 거리를 형성하기 전에 기능적인 역할이나 기업의 분야 등 전체적인 기획을 하여 건설적인 부분과 환경적인 부분들이 많이 개선되었다. ​ 그리고 당시 모아진 자금으로 천이페이 선생이 설계한 ‘예술의 문’을 예술의 거리 이정표로 설치하게 되었다. ​ 많은 예술가와 상가들이 들어서고, 그들 스스로 타이캉루를 관리하고 기획하게 되면서 현재의 예술의 거리(Art Street)가 되었고 각자의 지혜와 능력이 모이면서 타이캉루는 새로운 발전과 새로운 기회로 도약하게 되었다. Canon EOS 5D Mark II 1ㅣ50 F3.5 "타이캉루(泰康路) 지역의 역사적 특징" ​ 타이캉루는 프랑스 조계지2)의 도로를 연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지역은 조계지 확장 이후 얻게 된 지역이었을 뿐만 아니라, 중국측 지역과 인접한 곳이었기 때문에 잘 정돈된 프랑스풍의 양식 건물들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 상하이의 특색이 매우 짙은 스쿠먼 건축 또한 함께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건축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타이캉루 지역의 리농문화3)가 만들어졌다. ​ 타이캉루 지역이 위치해 있는 루완취(卢湾区)는 프랑스 조계지 문화를 주요 특징으로 갖고 있다. 프랑스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대다수 전도사나 문화인들이었고, 루완취의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역시 대부분 부유층에다 문화수준이 비교적 높았다. 동시에 조계 지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곳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많은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루완취에 거주하게 되었고 문화활동이 빈번하게 되었다. 2) 개항장(開港場)에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구역. 아편전쟁 이후 1845년에 영국이 상하이(上海)에 둔 것이 최초다. 이후 톈진(天津)·광저우(廣州)·샤먼(廈門) 등 각 개항장에 두었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에는 격증하여 영국·프랑스·독일·일본 등 8개국이던 조계가 무려 28개나 되었다. 조계 내의 행정권은 외국에 속하고 치외법권도 인정되어 실질적으로는 중국의 주권을 침해하여 해관(海關)의 관리권과 함께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적 침략의 기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중국의 국권회복운동으로 조계는 점차 폐지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완전히 중국에 반환되었다. ​ 3) 리농건축·리농주택이라고도 부른다. 골목을 가운데 두고 일렬로 붙어 있는 2~3층의 주택들을 리농주택 혹은 석고문 주택이라고 부르며, 개항 후 상하이의 조계지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주택형태로서 상하이 특유의 근대건축물이다. ​ 조계지 내에서는 각종 문화가 함께 발전하였다. 여기에는 신기한 것을 쫓는 해외파 문화가 있었고, 호화로운 사치를 중시한 소일문화가 있었으며, 격진적인 항의와 비판적인 문화도 있었다. ​ 스쿠먼 건축의 구석방에서는 수많은 중국 문예계의 신생역량이 배출되었다. ​ 유럽이나 라틴 아메리카의 문화가 건축이나 생활방식 등에서 재현되었다면, 중국 전통의 예의규범이나 문화는 여기에서 생활한 각계각층의 중국인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조계지의 건설은 상하이 시의 발전뿐만 아니라 서방문명의 전파를 부추기게 되었고, 근대 서방의 시정건설과 관리방법을 운용하여 중국 고유의 도시구조와 기능이 크게 변하였다. ​ 조계지 내에서는 세계 최고의 선진기술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서방 문명이 생활 속에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이 문화든 생활이든 중국인들과 서방 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 ​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서방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게 되고 서방 문명을 퍼뜨리게 된 것이다. ​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상하이 주민들은 서방 문화를 정리하여 중국의 전통문화 속으로 가지고 들어옴과 동시에 자신의 특색을 발휘하여 그것들이 해외파 문화의 중요한 부분이 되도록 하였다. Canon EOS 5D Mark II 1ㅣ50 F2.8 이와 동시에 루완취의 남부는 조계지역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시의 하층민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오두막이 대부분이었던 이 지역은 기본적인 시정부의 건설도 없었고 생활 환경이 매우 나쁜 노동자들의 생활 터전이었다. ​ 도시화가 진행되었던 북쪽은 구식 리농 건축물들이 많았고 프랑스풍의 건축물들도 간간히 섞여 있었다. 이곳은 인구 밀도가 높고 대부분 작은 상점들이었으며, 주민들은 대부분 소상인이나 종업원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이었다. ​ 타이캉루는 완전히 다른 남부의 일부였는데, 이 때문에 앞서 말한 북부 조계지의 문화와 남부 중국의 민간문화가 기이하게 융합된 것을 볼 수 있었다. ​ 이 지역에는 문학·예술계의 저명인사나 서양의 영향을 받은 서양 특색의 생활 방식이 존재하였고 리농문화의 시끌벅적함을 동시에 볼 수 있었으며 각기 생계를 위해 좌판들을 꾸려가고 있었다. ​ 고개를 끄덕이고 악수를 하면서 아침인사를 하는 서양식 인사법을 볼 수 있고 서양 악기의 은은한 음악소리도 들렸다. 또한 도로변의 좌판에서는 위생적이지 않은 각종 먹거리를 맛볼 수 있었고,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예술인들의 뛰어난 잡기와 무술시범 등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여기에는 질서와 혼란, 고상함과 통속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었다. ​ Canon EOS 5D Mark II 1ㅣ80 F3.2 루쟈완 구역이 중국과 서양의 결합부였다는 것 그리고 조계지와 비조계지 생활 형태의 융합 지역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이야기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 이는 중국인 지역의 바람을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고 동시에 중국인 지역도 여기를 통해서 서방 문명의 중국 전통에 대한 충격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북유럽-3편 노르웨이[Norway]문화와 스테브 교회(Stave Church)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09

북유럽-3편 노르웨이[Norway]문화와 스테브 교회(Stave Church) 청운대학교 교수 정희정 디자인학 박사 Samsung SM-G930K 1ㅣ269 F1.7 단 한 개의 못을 사용하지 않고 100% 나무만으로 레고 블록을 끼워 맞추듯이 끼우고 이은 노르웨이[Norway] 의 목조건축물인 스테브 교회(Stave Church)는 800년에서 많게는 1,000년의 고고한 세월과 함께하며 바이킹문화와 유럽 전통의 건축양식 그리고 교회 양식의 복잡한 혼합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오늘날도 주말예배와 노르웨이 사람들의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함께하며 생활 속에서의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 유아세례와 성년식 결혼식과 장례식을 살펴보면 교회가 얼마큼 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녹아들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Samsung SM-G930K 1ㅣ137 F1.7 Samsung SM-G930K 1ㅣ180 F1.7 노르웨이에는 바이킹 문화와 가톨릭 문화가 접목되어 노르웨이에만 있는 독특한 건축양식의 목조교회가 현존하고 있습니다. ​ 노르웨이 중세기의 이 교회는 스테브교회(Stave Church), 스타브키르케(stavkirke)라고 불리는 목조건축물로 12세기부터 1349년 흑사병 시기에 이르기까지 수천 개가 노르웨이 남쪽에 건설되었으나 거의 소실되어 없어지고 현재는 노르웨이 전역에 29개가 존재한다고 합니다. ​ 우리 일행은 오슬로에서 ‘베이토스토렌’으로 향하는 길목의 롬이란 마을에서 스테브교회(Stave Church)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 100% 나무를 주재료로 한 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나무를 레고 블록을 끼워 맞추듯이 끼우고 이은 목조교회는 800년에서 1,000년의 고고한 세월 속에 남아있는 신비로운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 스테브교회(Stave Church)의 특징은 마치 탑처럼 형성되어있고 맨 꼭대기에는 가톨릭 양식의 십자가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처마 끝에는 용머리가 달려 있습니다. 바이킹들이 숭상했었던 용머리를 교회의 처마에 달아둔 것은 노르웨이의 바이킹 문화와 함께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교회의 지붕은 마치 용의 비늘처럼 생겼습니다. 자작나무를 하나하나 깎아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특이점으로 둥근 형태를 곳곳에서 사용하였습니다. 마치 용의 몸통처럼 둥글게 기둥도 만들었습니다. ​ 이러한 건축양식은 오랜 시간 노르웨이의 바이킹 문화와 교회가 접목되어 나타난 건축문화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곳은 유럽국가의 가톨릭 성당의 특징으로 닭을 매달아 놓게 되는데 스테브 교회(Stave Church)에도 닭을 매달아 두고 있어 스테브 교회는 노르웨이 바이킹문화와 유럽 전통의 복잡한 혼합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 노르웨이에서는 스테브교회 같은 이런 곳은 예배도 보지만 태어나서도 죽을 때까지 계속 관계를 맺어온다고 합니다. ​ 아이가 태어나면 한국의 100일 잔치처럼 태어난 지 100일에 유아세례를 합니다. 가톨릭하고 80%가 닮아 거의 같다고 보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십자가에 예수님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모마리아를 믿지 않아 성모마리아 상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수도 사용하지 않지만 예배드리는 형식이라든지 모든 게 매우 동일하다고 합니다. ​ 유아세례를 주는데도 대부 대모를 세웁니다. 그리고 아이가 자라 16살이 되면 성인식을 치릅니다. 법적으로 만 18세인데 종교적으로는 16세라고 합니다. 노르웨이의 사람들은 성인식이 결혼식 다음으로 성대하게 치르는 전통을 오늘날까지도 이어오고 있습니다. ​ 중학교 고등학교 때는 의무적으로 종교에 봉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과정 중에 1년동안 교회에 나가 봉사를 합니다. 가톨릭의 봉사와 같이 흰 가운을 입고 가톨릭의 복자와 같은봉사를 해야 합니다. ​ 1년 동안의 봉사를 하고 나면 졸업할 때 성인식을 치러주게 됩니다. 그 무렵이면 성인식을 치를 사람들이 넘쳐나 토요일 일요일 오전 오후로 나누어 진행하는데 한 사람씩 쭉 제단 앞으로 나와서 10명 많게는 20명씩 한꺼번에 행사를 진행한다고 합니다. ​ 우리나라의 설날과 추석과 같은 노르웨이 사람들의 명절은 크리스마스 예수 탄생일과 예수 부활일입니다. 달력에 빨간 표시가 있어 공식적으로 3일씩 쉬게 되는데 보통의 노르웨이 사람들은 휴가를 내서 앞뒤로 일주일씩 쉬는게 일상적이라고 합니다. ​ 우리의 명절처럼 부모님께서 계신 곳으로 우리와 마찬가지로 친가와 외가 쪽으로도 찿아가서 지내는데 그 무렵이 되면 우리나라처럼 이동이 많게 됩니다. 국외에 사시는 그런 부모들은 자식들을 보러온다고 하니 우리와 닮은 점도 많습니다. ​ 노르웨이의 국경일은 예수승천일과 성령강림일인데 성령강림일 때에는 이틀을 쉬게 됩니다. 종교의 절기가 이 나라의 국경일로 되어 있을 정도이니 종교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로 일상생활 속에 아주 밀접하게 파고들어 있습니다. ​ 그러나 특이하게도 노르웨이 사람들은 전체인구의 76%가 교회에 등록되어 있는데 출석률은 3%로 교회는 잘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는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교회는 안 가지만 믿는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부활절, 유아세례, 성인식을 치를 때 결혼식, 장례식 때만 나온다고 합니다. ​ 들리는 이야기로 노르웨이의 종교지도자들이 출석률을 높이려고 예배 형식도 바꿔보고 해석도 다르게 해보고 또 찬송가도 신세대에게 맞게 작곡도 하고 배포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출석률에는 별반 변화가 없었다고 합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교회는 그래도 믿는다고 얘기합니다. 그만큼 삶과 생활 속에 녹아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Samsung SM-G930K 1ㅣ10 F1.7 ​ 노르웨이 사람들은 결혼식도 교회에서 하고 장례식도 교회에서 합니다. 그래서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교회와 연관되어 살아갑니다. ​ 노르웨이 사람들의 결혼식과 장례식을 살펴보면 교회가 얼마큼 그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녹아들어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 노르웨이에는 예식장이 없습니다. 예식장이 바로 교회라고 합니다. 노르웨이 국민의 95%는 교회에서 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무료이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남은 5%의 사람들은 왕궁 또는 지방자치가 보유하고 있는 홀 같은 곳을 임대하여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 노르웨이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합니다. 특이점으로 결혼축의금이 없습니다. 노르웨이에서는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 노르웨이의 전통복장을 입고 참석하는 축하객들도 많지 않아 평균적으로 70명 안팎에 미치는 검소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러한 문화는 결혼식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신랑 신부가 부담하는데 있다고 합니다. 축의금이 없이 신랑 신부가 다 모든 비용을 지출하게 되므로 아무리 친하더라도 초대 안 하면 안 가는 게 문화입니다. ​ 신랑 신부는 자기의 경제적인 여력을 보고 인원수를 정합니다. 지출이 많으므로 작은 인원을 초대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직계가족과 친척들 그리고 학교 친구와 직장동료 중에서 몇 명만 초대한다고 합니다. 양쪽 다 합해봐야 70명입니다. ​ 노르웨이 사람들은 매우 합리적이고 자립심이 강합니다. 노르웨이는 18세가 되면 다 분가하며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합니다. ​ 노르웨이 부모들은 자식들을 도와주지 않기로 유명합니다. 죽을 때까지 절대 안 준다고 합니다. 자식들 결혼할 때 주택마련 자금을 보태주거나 집을 사주거나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일입니다. 부모가 죽고 나서야 유산으로 물려받는다고 합니다. ​ 그래서 모든 비용을 자기가 내야 하니까 최소화하여 결혼식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다음 기회에 노르웨이의 결혼문화에 대하여 상세하게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결혼식과 파티가 끝나면 하루 이틀 쉬었다 대부분 한 달 이상의 신혼여행을 떠납니다. Samsung SM-G930K 1ㅣ10 F1.7 ​ 노르웨이의 모든 근로자들은 휴가가 1년에 5주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음에 넘겨서 쓸 수도 있고 반만 남겨서 쓸 수도 있고 또 5주는 남겨서 다음에 10주를 쓸 수도 있고 또 그 다음 것을 미리 앞당겨 쓸 수도 있으니 그걸 모아서 한 달 이상을 만들게 된다고 합니다. ​ 신혼여행은 자국보다는 오히려 비용이 저렴하게 드는 스페인 태국 동남아 쪽으로 많이 가는 게 노르웨이의 결혼문화입니다. ​ 우리하고는 많이 달라 보입니다. 장례식 문화는 더욱 그렇습니다. ​ 장례문화는 먼저 며칠 장을 하느냐로 시작됩니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삼일장을 하는데 노르웨이는 며칠 장 이라는 그런 개념과 원칙이 없다고 합니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게 되는데 여름에는 최소 2주 이상이며 겨울에는 한 달 이상 하게 됩니다. ​ 물론 장례식도 성인식이나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교회에서 합니다. 우리나라는 병원의 장례식장 등에서 하는데, 노르웨이는 병원에 그런 시설이 전혀없다고 합니다. 장례식장 대신에 장의사 제도가 있고 장의사의 시스템이 잘 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신은 장의사가 모시고 가서 시내의 냉동실에 보관하게 되고 장례식장은 교회에서 한다고 합니다. ​ 물론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조의금 문화가 없습니다. 바이킹 시대부터 지금까지 노르웨이는 남자문화로 오늘에 이르러왔고 모든 것을 남자가 한다고 합니다. 장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장남과 장자문화입니다. ​ 여기서부터 노르웨이의 장례식에 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지가 시작됩니다. ​ 첫 번째 이유로, 장남이 어디 먼 곳의 국외에 출타 중이거나 연락이 안되면 장례식 날짜를 못 잡는다고 합니다. ​ 두 번째 이유로, 노르웨이는 초대문화로 몇 사람을 초대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그 인원수가 확정되면 부고장을 보내게 되는데 전화나 E-mail로 보내지 않고 우편으로 보내는 데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또 참석 여부 확인하는 데 며칠이 소요되므로 쉽게 일주일이 지나가 버린다고 합니다. ​ 세 번째 이유로, 교회에서 장례식 예배를 보는 날짜와 시간을 잡아야 합니다. 노르웨이는 주일만 예배를 보며 평일에는 없다고 합니다. 예배는 딱 주일 그날만 보는데 그것도 11시에서 12시10분으로 딱 1번만 예배를 봅니다. ​ 유아세례와 성인식도 있으며 결혼식과 장례식을 해야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리는 특성상 날씨 풀리는 날까지를 고려하다 보면 장례식이 한 달 이상이 된다는 이유에 고개 가 끄덕여지게 됩니다. Samsung SM-G930K 1ㅣ25 F1.7 ​ 필자는 유럽 전역의 많은 교회와 성당들은 보았지만, 북유럽의 건축 기행 중에 만났던 스테브교회(Stave Church)의 풍경과 노르웨이 사람들의 교회 문화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 태어나서 삶과 함께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리고 후손들이 대대손손 선조의 손때 묻은 교회에서 예배보는 깊고 또 깊은 그런 교회 문화를 생각하며 얼마 후면 건축공사를 마치고 들어가게될 성당을 떠올려 봅니다. ​ 주님! 제 뜻이 아니라 저를 빌어 주님의 뜻에 따라 성당을 그려주시옵소서. 아멘. 2016년 7월 10일 본당 신부님으로부터 주말 미사중 형제자매님들 앞에서 성당 건축위원의 총괄계획가로 임명 받으며 독백했던 기도입니다. ​ 이후 필자는 거창할지도 모르지만,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빌리아 대성당에서 기도를 드리며 경험했던 신비로움도 떠올리며 자연환경과 조화를 잘 보여주는 핀란드의 템펠리아우키오 교회와 바이킹 시대 노르웨이의 스테브교회(Stave Church)를 떠올리며 규모는 작지만 자연환경과 조화로우며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성당 건축에 기여하고자 꿈꾸었던 적이 있습니다. ​ 당시 자연녹지를 가로지르는 보조 간선급 중소도로의 부당함과 도시계획예정도로에 대한 성당부지 계획고시 관련 문제 등에 문제를 제기하며 도로분절로 인한 생태통로차단, 인접 건축물의 표고 편차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와 축벽이 형성되어 해치게 될 경관 등에 대하여 문제를 거론하며 공동체의 집단적 의사결정에 대한 모순점을 들기도 했었지만 교구와 한국카톨릭 건축본부가 존재함으로 자칫하면 성스러운 성당건립에 분란이 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청하여 물러났습니다. ​ 필자는 주인 되는 우리가 성당 건축의 콘셉 방향을 잡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카톨릭의 건축위원회와 협의해가며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며 건축될 성당 대지의 향에 대한 우려로 남서향에 고창과 측창을 극대화하여 자연채광을 확보하고 풍부한 일조량의 유입설계를 권고하며 아울러 빛 환경[빛설계]과 소리 환경[음설계]까지도 설계되어야 하는 필요성과 성당 건축의 주체인 우리가 알아야 할 사항들로 김종수의 성당건축과 전례를 참고하여 성당건물이 지녀야 할 특성과 전례적인 요소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 마지막으로는 건축원칙[지향점]을 만들어 실천해 나갈 것을 권고하고 14가지의 원칙을 설정해 드렸습니다. ​ ​ 14개의 원칙으로는, 01 자연에너지를 활용합니다. ​ 02 가공재와 인공재를 지양하고 자연재를지향합니다. ​ 03 자연채광과 자연 환기를 철저히 계산하고 고려하여 설계합니다. ​ 04 사회적 약자를 배려합니다. [남녀노소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유니버셜 디자인과 베리어프리 디자인을 적용합니다] ​ 05 냉난방의 에너지원을 고려하여 설계되어야 합니다. ​ 06 커뮤니티공간을 구성해야 합니다. [형제자매님들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구성해야 합니다 예)커피숍 베이커리 성물방 패스트푸드 등 쉴 공간 놀 공간 독서공간 등] ​ 07 성가대를 회중의 중심이 되도록 앞쪽에 배치해야 합니다. ​ 08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의 성당을 동시에 실천할 수 있도록 계획하여야 합니다. ​ 09 공개공지를 활용하여 친환경 성당을 설계하여야 합니다. ​ 10 지면의 편차를 활용하여 필로티를 형성하고 하단부에 넉넉한 주차공간을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 11 주차장 진출입과 회차 진행 등에 있어 미사 중 소음에 대비하고 교통안전에 대한 예방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 12 독창적이면서도 안전하고 견고하고 품위있는 성당을 설계해야 합니다. 이외에도중요한 원칙을 세우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로드맵을 설정해야 합니다. ​ 13 공개공지와 녹지를 확보해야 합니다. ​ 14 주차대수 최대화 방안으로 법정 주차대수에 준하는 게 아니라 신자 수에 준하여 현재의 주차 요건을 충족할만한 대안을 제시하여 설계에 반영하여야 합니다. 2017년 2월 5일 필자는 건축위원회에 내용을 전달하며 건축위원회에 사직을 청하였습니다. 이제 곧 성당 건축이 끝나고 형제자매님들이 새로 지은 성당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건축법규 이상의 배려가 스며있는 그런 성당을 맞게되기를 소원합니다. ​ 평균적인 계측으로 건축법규에만 맞추어 인간적인 휴먼스케일을 고려하지 못하여 계단의 발 디딤판의 넓이와 높이는 높게 되지 않았기를, 계단실 손 스침의 높이는 어떠할까? ​ 층별 실별 평면계획은 유연하여 편리한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을까? ​ 휠체어를 사용하거나 거동이 불편한 사회적 약자에게 편리하도록 턱과 단차를 없애고 특히 화장실을 편하게 사용하게는 되어있을까? ​ 많은 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크고 작은 건축물에 대한 심의 심사 평가 자문을 하고 있으니 성당도 다수가 이용하는 공공건축물에 해당됨으로 성당에 다니는 신자를 넘어 객관적 시각으로 보는 과학적이며 보편적이고 안전하고 편리한 그런 성당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독백의 변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라 생각합니다. ​ 본 저널의 지난 8월호에 대화재로 일부 소실된 노트르담[NOTRE-DAME] 대성당의 재건을 위한 콘셉트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 또한 핀란드의 템펠리아우키오 교회와 바이킹시대 노르웨이의 스테브교회(Stave Church)를 떠올리며 우리 성당은, 우리는 작아서 그런 교회와 성당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이해시켜 드리기에는 참으로 필자에게 어렵고 힘든 고민이었습니다. ​ 이제 곧 입당입니다! 성당 건축을 위해 힘 써주신 모든 분들께 존경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북유럽 2편 - 노르웨이 오슬로 Norway Oslo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08

북유럽 - 2편 노르웨이 오슬로 Norway Oslo 청운대학교 교수 정희정 디자인학 박사 Samsung SM-G930K 1/1612s F1.7 ​ 바이킹의 나라! 신의 목장! 신들의 정원! ​ 바이킹들이 살던 도시 노르웨이! ​ 바이킹들의 문헌을 살펴보면 아메리카 대륙을 제일 처음 발견한 서양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보다도 훨씬 전인 600년 전에 이미 바이킹들이 배를 타고 발견했다고 합니다. ​ 노르웨이 아이들은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날 때 스키를 신고 태어난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키와 크로스컨트리 같은 경기가 노르웨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Samsung SM-G930K 0.017s F1.7 신의 목장! ​ 신도 죽고 인간도 죽고 모든 것이 다 철저하게 파괴된 다음에 그곳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노르웨이 사람들의 세계관이라고 합니다. ​ 어둡고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노르웨이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고단하고 힘든 삶이 끝나고 나야 좋은 것이 온다는 희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북유럽 신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 Samsung SM-G930K 1/260s F1.7 노르웨이의 전체면적은 약 38만 제곱 킬로미터에 이릅니다. 한국 면적의 약 4배 정도며 남북한 면적의 1.7배나 됩니다. ​ 이 넓은 땅에 2016년 기준으로 521만 명이 산다고 합니다. 인구 밀도로 따지면 제곱킬로미터당 16명이 사는 그런 모습입니다. ​ 노르웨이는 전 국토의 83%가 산으로된 산악 국가입니다. 또한 강, 호수, 계곡, 빙하 같이 물과 관련된 곳이 12%로 95%가 자연인 셈입니다. ​ 전 국토의 5%만 개발되어 있는데 그중 2%가 사람이 사는 곳 이라고 합니다. ​ 노르웨이는 여러 분야에서 세계 1위입니다. 평균 수명, 도시인들의 교육 수준, 국민 소득 1위의 나라. 그래서 전 세계 OECD 회원국 중에서 총 소득 대비 다른 나라에 원조를 해주는 금액도 가장 높은 곳이 바로 이곳 노르웨이입니다. ​ 노르웨이 수도인 오슬로는 신의 목장과 빛의 도시로 불리며 무역, 교육, 연구, 산업, 교통, 정치, 경제의 중심지로 노르웨이 전체인구 약521만 명 중 90만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 약 900년 전 북유럽을 주름잡던, 바이킹들이 활약하던 바이킹 전성시대에는 바이킹의 수도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는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반도로 북위 51도에서 72도 사이에 있습니다. 한국의 독도가 동경 132도 북위 37도에 있는 점을 보면 긴 겨울을 보내는 북방인들로 바로 노르만족이라고 불리는 민족이었습니다. 조그만 얼굴에 금발의 푸른 눈 바이킹들이 살던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인들을 일컷는 말입니다. ​ 북유럽 사람들은 바이킹시절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했다는 것을 정설로 믿고 있습니다. 모험심과 개척 정신, 도전 정신이 강합니다. ​ 들리는 이야기로 프랑스에 노르망디 지방이 있는데 노르망디 지방에 바이킹들의 노략이 많아 너무 귀찮고 힘들어서 땅을 떼주고 ‘너희들이 여기서 모여 살아라’. 그래서 노르만족이 모여 사는 땅이다 해서 노르망디라는 이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칼스타드협정에 의해서 노르웨이가 독립했는데 덴마크 왕이 바로 이곳 노르웨이에 와서 왕을 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1940년도에히틀러가 노르웨이에 침략해 노르웨이 왕가는 히틀러와 맞서서 싸웠고 영국에 망명을 가게되며 한국이 상해에 임시 정부를 만들었던 것처럼 노르웨이는 망명 정부를 영국에 만들기도 했습니다. ​ 노르웨이는 왕세자가 취임할 때 대관식을 굉장히 작은 규모로 한다고 합니다. 또한 왕족을 귀족 학교로 보내는 게 아니라 일반 국립학교를 보내서 일반 평민들과 똑같이 지내게 합니다. 노르웨이는 시의원도 자기 직업이 따로 있습니다. 의원직이 전직이 아니라 겸직입니다. 또한 올림픽 국가대표도 우리처럼 태릉선수촌서 운동만 하는 게 아니라 각자 직업이 따로 있다고 합니다. 그냥 운동을 잘하는 사람을 모아 대표선수를 한다고도 합니다. Samsung SM-G930K 1/336s F1.7 오슬로는 1048년 하랄 왕조 시대의 왕이었던 하랄 3세 왕이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3천 명 정도 사는 규모의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들이 믿는 신의 이름 오스와 구름이 많은 지역의 특징을 따서 로로 정했습니다. 신들의 정원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 도시가 쭉 번성하다가 1624년도에 대화재가 일어나 3일 동안 멈추지 않고 도시가 전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도시를 다시 건설하고 도시 이름을 새롭게 붙이는데 그때 건설했던 왕이 덴마크의 왕이었습니다. ​ 노르웨이가 덴마크의 식민지로 덴마크 왕이 노르웨이 왕까지 겸하고 있었는데 그 덴마크의 왕이었던 크리스티안 4세가 도시를 건설하고 자기의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술과 여자와 전쟁을 즐겼던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오슬로라는 이름을 버리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크리스티아니아라고 도시명을 개명합니다. 이후 1624년서부터 1925년까지 크리스티아니아로 불렸습니다. Samsung SM-G930K 1/120s F1.7 덴마크와 스웨덴의 식민지가 끝나고 옛 이름을 되찾아 크리스티아니아에서 1925년 오슬로로 개명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최초의 수도는 북부에 위치한 트론헤임이었으며 베르겐이 노르웨이의 두 번째 수도였습니다. 오슬로는 세 번째 수도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 전체 면적이 454 제곱 킬로미터 내에 2015년 4월 기준으로 66만 명의 시민이 살고 있으며 노르웨이 반경 45킬로미터 내에 158만 명이 살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전체 인구 521만명 중에 오슬로와 수도권 지역 내에 158만 명이 살고 있어 인구 밀도가 1제곱킬로미터에 1,460명이 됩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모입니다. ​ 그러나 반경 45km 수도권을 벗어나면 사람들을 만나보기가 어렵습니다. ​ 노르웨이 기행중 오랜만에 하늘이 맑고 햇빛이 나옵니다. 1952년 동계올림픽이 열렸던 스키점프대가 있는 홀멘콜렌(Holmenkollen) 레스토랑에서 우리일행은 점심을 들면서 바다와 내륙 오슬로 시가지의 신비로운 모습에 넋을 잃었습니다. ​ 바이킹의 나라! ​ AD 800-1050년 사이의 바이킹 시대! ​ 스웨덴과 덴마크 그리고 노르웨이를 바이킹의 나라로 부릅니다. 바이킹이란 뜻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만[연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만[연안]이 있으니까 바닷가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바닷가와 피오르 내륙까지 깊숙이 들어온 바다 그곳에서 바이킹들은 생활했는데 생존을 위해서 세 가지를 했습니다. ​ 첫째, 식량과 돈 되는 것을 약탈하러 다녔고 두 번째는 영토를 확장하러 다녔습니다. 세 번째는 무역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역할을 다 하던 사람들이 바이킹족입니다. ​ 위의 세 가지를 실천하기 위한 능력의 결정체가 이동수단인 배의 발전입니다. 노르웨이는 전 국토 83% 산과 12%의 물로 더우기 해안선이 육지 기준 2만km에 이르게 됩니다. 지구 둘레가 4만km인데 2만km이니 그 길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리아스식 해안보다 더 복잡한 피오르 해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 만[연안]에서 생활하기 위해서 이동수단인 배를 만들어서 서로 교통수단으로 이동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배 건조 능력이 탁월했고 항해술도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이동수단 외에 전투 능력도 필요했습니다. 서유럽 신들의 아버지를 제우스라고 한다면 북유럽 신들의 아버지는 오딘[Odin]으로 북유럽에서는 오딘신의 힘을 숭상했습니다. ​ Samsung SM-G930K 1/1252s F1.7 오딘은 하늘나라에 540개의 대문이 있는 엄청나게 커다란 바랄라 궁에 사는데 바이킹 전사들이 생명을 잃으면 그 영혼들을 다 불러 매일 밤 연회를 베풀어준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오딘은 그 바이킹 전사들의 영혼을 불러서 매일 밤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러고 또 연회를 베풀어주고 마지막 결전의 날을 기다리게 됩니다. ​ 보통 지휘관이 공격 명령을 내리면 와!하고 함성을 지르곤 하는데 바이킹은 오딘을 외칩니다. 자기 신의 이름을 부르며 공격을 한다고 합니다. ​ 그래서 바이킹들이 전투중 사망하면 오딘이 다 불러준다고 합니다. 전투력이 엄청나게 강하며 오죽하면 바이킹시대에 태어나서 천수를 누리고 죽으면 지옥 간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고 합니다. ​ 바이킹들은 전투에 참여해서 장렬히 전사해야 천국에 간다고 믿고있어서 전투력이 강하며 거기에 조직력까지 겸비합니다. ​ 그 조직력이 바이킹의 법 때문인데 ​ 첫 번째 법이 과감하고 용감해라. 두 번째 법이 사전에 모든 것에 대해서 준비해라. 세 번째 법은 유능한 상인이 돼라 네 번째 법이 캠프의 질서를 유지해라. ​ 그 규율에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조직이 움직이게 됩니다. ​ 식량을 약탈하러 다니는 이유로는 이 나라의 기후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북유럽 연안의 평균 기온이 4도씨, 내륙은 7도씨 추울 때는 영하 30도까지 떨어지며 여름철의 평균 기온은 17도씨입니다. 더울 때는 32도까지 올라갈 때가 있는데 불과 며칠 안 된다고 합니다. ​ 대부분 10도씨 미만이 되는데 평균이 17도로 곡물이 안 됩니다. 그리고 다 돌투성이 땅입니다. 그래서 기후가 취약하고 땅은 넓지만 농사지을 수 있는 비옥한 땅이 없어서 고랭지 곡물, 채소 밖에는 오늘날도 재배 되지 않습니다. ​ 바이킹시대부터 지금까지 곡물이 부족해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 위도로 따지면 소수점을 생략하고 반올림하면 최남단 만달이라는 지역이 위도 58도 최북단 시르케네스가 71도, 그래서 58도에서 71도 사이에 있고 경도로 따지면 4도에서 31도 사이에 있습니다. 그래서 여름에는 백야가 있고 겨울에는 흑야가 있습니다. ​ 신들의 정원! ​ 신들의 정원으로 불릴 만큼 요툰헤이멘 국립공원으로 가는 길은 경이롭고 아름다웠습니다. 해발 1,000미터에서 1,100미터 사이를 지났습니다. 이렇게 1,000미터 이상이 되면 황량한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곳을 툰트라 지대라고 합니다. ​ 큰 나무가 자라지 않은 조그만 관목 그리고 돌과 얼음과 풀이 있는 툰트라 지대를 따라 우리는 만년설을 만나기 위해 그로텔리지로 올라갑니다. ​ 게이랑에르 피오르를 볼 수 있고 그림 같은 아주 예쁜 집들이 펼쳐져 있는 게이랑에르 피요르드 마을은 신들의 정원이라 불리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 게이랑에르 피오르 하당에르 피오르와 함께 노르웨이의 3대 피오르 중에 한 곳인 송네피오르는 노르웨이 피오르 중에 가장 아름답다고 합니다. 유네스코 자연유산에 등록된 피오르를 필자는 유람선을 타고 건넜습니다 두 시간 정도의 짧은 항해였지만 절벽을 이룬 산에서 폭포들이 셀 수 없이 길다란 물줄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 빙하가 있으면 반드시 피오르드가 형성 됩니다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입니다 빙하가 피오르를 만들었고 피오르는 빙하에 의해서 형성이 됐기 때문입니다. 운이 좋으면 고등어 떼가 들어오고 그 고등어를 잡아먹기 위해서 같이 따라 들어오는 물개떼 모습도 볼 수 있는 그런 곳이라고 합니다. Samsung SM-G930K 1/2128s F1.7 빙하입니다! ​ 요스테달빙하 국립공원 전체면적이 487제곱킬로미터 그리고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80킬로미터의 높이로 낮은 곳은 60미터 높은 곳은 600미터 얼음산이 있는 그 지대가 요스테달빙하 국립공원입니다. ​ 그 빙하지대의 한 자락인 크리스털 빙하 국립공원지대를 따라 빙하의 모습을 만났습니다. ​ 크리스탈 빙하에서 녹아내린 형용할 수 없이 맑고 깨끗한 물빛에 넋을 빼앗긴 채 내륙의 106km까지 들어온 바다 노르피오르도 만나게 됩니다. 그 자락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림같은 그런 풍경을 감상하면서 갈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 얼음이 형성되는 기간을 빙하기, 얼음이 녹는 걸 해빙기라 합니다. 빙하는 눈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가령 겨우내 눈이 3미터가 온 후 여름이 지나서 다시 겨울이 올 때까지 한 2미터가 녹아내리고 1미터가 남아있습니다. 100년 1,000년 만년이 지나면서 그게 쌓이게 되는 것을 빙하라고 합니다. ​ 빙하가 1,000미터에서 3,000미터 얼음 상이 되면 하부에 엄청난 압력이 가해지게 되는데 녹아내리고 얼고를 반복하면서 떨어져 내리고 파이면서 U자의 계곡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이 U자의 계곡을 피오르라고 부르는데 빙하의 압력으로 해수면보다 더 깊게 파이고 바닷물이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2천미터 이상 되는 산 밑의 계곡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는게 피오르입니다. ​ Samsung SM-G930K 1/1324s F1.7 강은 물이 만들어서, 물에 의해서 형성이 되지만, 피오르는 빙하, 얼음에 의해서 형성이 됩니다. ​ 비가 오지 않아도 끊이지 않고 흘러내리는 폭포수 아래는 목가적인 산촌의 풍경 그리고 만년설과 빙하와 어우러 피어있는 들꽃과 야생화를 보면서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같은 아름다운 풍경도 느낄 수 있는 신들의 정원. ​ 찜통더위입니다! 노르웨이의 시원한 피오르 풍경과 폭포를 보면서 폭염의 더위를 식힐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북유럽 1편 - 노르웨이 베르겐 Norway Bergen

정희정교수의 공공디자인 세계기행 07

북유럽 -1편 노르웨이 베르겐 Norway Bergen ​ 청운대학교 교수 정희정 디자인학 박사 2011.7 Canon EOS 5D Mark II 24-70mm 1/500s F7.1 항구도시! 무역의 도시! 교육의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 섬유산업의 도시! 이 모두 노르웨이 남서 해안의 베르겐[Bergen]을 일컫는 말입니다. ​ 1년 365일 중의 260일 비가 내리는 도시 베르겐[Bergen] 중세 북유럽의 상업권을 지배한 역사를 간직한 베르겐, 이곳에서 생활했던 상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으며 당시의 번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가득합니다. ​ 2011.7 Canon EOS 5D Mark II 24-70mm 1/500s F5.6 노르웨이의 국토는 스칸디나비아 산맥을 따라 해안선의 길이만 약 25,148㎞에 이르는 기다란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 버스로 피오르해안을 온종일을 달리고 산과 피오르드를 보면서 노르웨이는 불모지가 많아 대부분의 식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II 24-70mm 1/500s F5.6 베르겐 풍경! 이제 베르겐까지는 30분 남았습니다. ​ 지형이 남북으로 길고 산과 피오르드의 장애로 수상 교통의 역할에 의존하고 있으며 대도시는 항구를 중심으로 발달해 있습니다. 역사적 항구도시! 과거 노르웨이의 수도였던 베르겐을 만나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가슴이 설렙니다. ​ 세계적으로 가장 길고 깊은 ‘송네피요르드’를 페리[Ferry]로 건너고 또 먼 길을 달려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를 향하는 길에 들른 노르웨이 남서 해안의 항구도시인 베르겐(Bergen)에 도착할 무렵 점점 빗줄기는 굵어지고 있었습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우산을 펼쳐 들고 플뢰엔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베르겐은 아름답습니다. ​ 특히 북해와 연결된 보겐만을 따라 펼쳐진 독특한 모양의 건축물들은 흐린 날씨와 잘 어울리는 우수에 찬 신비롭고 아름다운 모습을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 베르겐은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무역과 상업의 북유럽 최대 항으로 엄청난 양의 소금이 거래되었으며 북해와 아이슬란드에서 잡아 온 생선을 모아 유럽 각지로 공급하는 식량 창고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브뤼겐 거리 ​ 베르겐의 항구에 건설되었건 독특하고 예쁜 색의 목조 건축물은 과거 화재로 여러 차례 훼손되어 지금은 약60여 채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 이곳에서 생활했던 상인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으며 당시의 번영과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관광자원이 되어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가득합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5.6 1701년에 대 화재로 90%가 불타고 60여 채가 보존되고 있습니다. 목재로된 건축물로 그 피해가 컸던 것 같습니다. 브뤼겐의 지명은 ‘부둣간’이라는 말로 목재건축물들을 브뤼겐 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79년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되었습니다. ​ 브뤼겐의 목조건축물은 95%가 개인의 지분으로 소유하고 있으며 5%가 베르겐 시 소유라고 합니다. 소유주가 입장료를 받을 수도 있었으나 베르겐시가 권고하여 지역 상인들에게 임대를 주고 관광객들에게는 무료로 개방하여 운영하고 있습니다. ​ 그곳에는 보석가게 또 모피가게 선술집, 레스토랑 등이 많이 있으나 옛날 모습 그대로 유지·관리하고 있습니다. ​ 베르겐 어시장 ​ 브뤼겐 거리 건너편의 베르겐[Bergen]항구에서 매일 열리는 노천시장의 풍경은 또 다른 재미가 있습니다. 토르게 어시장[Fiske torget]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11세기 초 항구도시 베르겐이 형성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어시장으로 40여 개의 상점과 노점들로 이루어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지만 북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 중 하나입니다. ​ 베르겐 주변에서 잡히는 물고기의 집결지였던 이곳은 대구, 연어, 새우 등 신선한 해산물들이 거래되고,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 수공예품, 꽃, 과일 등도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 잠시 현대식 어시장을 운영하기도 했지만 과거의 어시장을 그대로 연출하기 위하여 노점과 포장마차를 허용하여 어시장의 풍경과 맛을 극대화시켰다고 합니다. ​ 유람선과 요트가 즐비한 베르겐 항구 앞 광장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시대의 거리 브뤼겐(Bryggen)과 베르겐항구는 노르웨이의 아름다운 피오르 여행과 북극권 크루즈 관광의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5.6 항구도시 무역의 도시 교육의 도시 문화예술의 도시 섬유산업의 도시 이 모두 베르겐[Bergen]을 일컫는 말입니다. ​ 노르웨이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베르겐입니다. 1년 365일 중 260일이 비가 온다고 합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도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이곳 사람들도 베르겐 와서 햇빛을 보았다면 행운으로 이야기할 정도로 베르겐은 비가 많이 내립니다. ​ 베르겐 앞바다에 광구가 있어 석유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으며 다음으로 선박과 관련된 사람들로 선박 기자재 요트 등 특수선박을 만듭니다. 선박에 쓰는 각종 기계류도 만들며 설비선과 어선도 만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생선가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합니다. ​ 이곳에서 각종 생선을 가공합니다. 노르웨이에서 모든 연어의 90%는 냉동연어로 베르겐에서 수출되는데 한국에도 이곳에서 수출된다고 합니다. ​ 또한 노르웨이 최고의 섬유산업 도시가 베르겐으로 섬유공업이 많이 발달하여 노르웨이에서는 베르겐이 섬유산업의 메카입니다. ​ 각종 물품 수출의 무역 항구이며, 교육의 중심 도시로 베르겐대학이 노르웨이에서 3번째로 큰 대학이며 시민들은 전성기 시대의 수도였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명한 예술가, 음악가, 화가와 철학가, 종교 저술가, 극작가들을 배출한 고장이기도 합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베르겐은 독일의 건축양식과 문화들이 많이 있으며 베르겐을 가장 많이 찾는 나라가 독일이라고 하는데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한자[Hansa]’조직에 그 배경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한자[Hansa]조직은, 중세 북유럽의 상업권을 지배한 북부 독일 도시들과 외국에 있는 독일 상업 집단의 이익을 위해 창설한 것으로 12~ 14세기 중엽 한자 동맹에 가입한 도시는 절정에 이르렀으며 런던, 브뤼지, 베르겐 등에서 16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북방 무역을 독점하였다고 합니다. 한자조직은 자체 방어를 위하여 해군을 소유하고 법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신항로의 발견 뒤 한자조직에 동맹한 조직들은 급속히 쇠퇴하게 됩니다. ​ 경쟁력이 떨어지게 되면서 1699년에 마지막의 한자동맹 회의 후 해체되게 됩니다. ​ 이후 영국과 네덜란드가 동방을 개척하게 되는데도 독일 상인들은 노르웨이에서 1760년까지 장사를 하며 남은 독일 사람들은 베르겐 시민이 됐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노르웨이의 베르겐은 지금도 독일의 문화가 많이 남아있습니다. 독일 양식의 건축물과 거리 이름, 학교, 교회 등 독일 사람들이 지어놓은 그런 집단 거주지가 바로 브뤼겐입니다.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의 산중 도시 바둘라!-1편

바둘라를 통해 본 스리랑카의 공간과 새해 문화

인도의 눈물! 스리랑카의 산중 도시 바둘라! -1편 "바둘라를 통해 본 스리랑카의 공간과 새해 문화" 2019.04.06~2019.04.20 ​ 정 우 람 솔 공공디자인저널[본지]기자 바툴라 시티 풍경 Canon EOS 600D 1/150s F8.0 "스리랑카의 새해가 시작되는 4월, 현지인들과 새해 축제를 함께하며 공간과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산 속에 마을이 있는 모습Canon EOS 600D 1/150s F8.0 처음 스리랑카를 들었을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외국인 근로자였습니다. 그만큼 한국에는 스리랑카인들이 많이 있지만 한번도 그들의 국가와 문화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 인도의 바로 밑, 눈물 모양의 섬 형상 때문에 인도의 눈물로 불린다는 것 또한 이번 기행을 통해 안 사실입니다. 수도 콜롬보 시티-기차와 나란히 달리는 툭툭 Canon EOS 600D 1/150s F8.0 출퇴근길에 스쳤던 무뚝뚝할 줄 알았던 스리랑카인들은 우리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스리랑카의 새해가 시작되는 4월, 현지인들과 새해 축제를 함께하며 공간과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 스리랑카의 기차와 버스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문이 있지만 문을 닫지 않고 열고 달립니다. 정해진 좌석은 없고,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문에 매달려 다닙니다. 한번 출발하면 잘 멈추지 않고, 달리는 차에서 내리고 달리는 차에 올라탑니다. 우리나라의 여름보다 더 덥고 습하지만 좁은 공간에서 어느 누구 하나 찌푸리는 표정이 없습니다. 오히려 눈을 마주치면 웃어주며 다음 행선지를 물으며 안내 해주려는 순수한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 영어를 기본적으로 모두 잘하기 때문에 토착 언어인 ‘싱할라어’나 ‘타밀어’를 못해도 많은 대화를 나눠볼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여유로워서일까요. 출발 시간표는 시간표일 뿐 운전하는 기사 마음대로 출발하고 도착하는 것을 보면 부지런한 사람도 여유로워지는 스리랑카의 대중교통 시스템이 인상 깊습니다. 바다와 기찻길과 도로가 나란히 있는 모습 Canon EOS 600D 1/150s F8.0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차 Canon EOS 600D 1/150s F8.0 ​ 공항이 있는 수도 ‘콜롬보’에서 ‘마타라’까지는 해안을 따라 기찻길이 나있습니다. 기차가 옆으로 넘어지면 바로 빠질듯한 인접한 해안을 따라 달리는 기차는 바다 위를 달리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바다와 가깝고 도시와 가까워지면 바다와 기찻길, 도로 세 가지 길이 모두 나란히 붙어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도로 위 수 많은 툭툭들 Canon EOS 600D 1/150s F8.0 ​ 기차와 버스에서 내리면 대부분의 이동수단은 툭툭(TUKTUK)을 이용합니다. 오토바이를 삼륜으로 개조하여 만든 작은 택시는 스리랑카의 어느 곳이든 구석구석을 누빌 수 있습니다. 도보를 걷는 사람보다 툭툭이 더 많을 정도로 툭툭은 여행자든 현지인이든 누구나 이용하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스리랑카의 교통수단입니다. ​ 신호등이 거의 없고 좁은 도로와 비포장도로가 많은 스리랑카의 도시 환경에 적합한 최고의 교통수단입니다. ​ 스리랑카 식물의 생명력 Canon EOS 600D 1/150s F8.0 ​ 필요한 길목만을 잘라낸 모습 Canon EOS 600D 1/150s F8.0 적도와 가까운 열대성 기후의 스리랑카는 식물의 생장속도가 빠르고 크기도 큰데 그에 따라 도시의 공공재들도 함께 어울리는 모습들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빠른 속도로 자라는 나뭇가지를 전부 정리할 수 없기에 전깃 줄이 애초에 나뭇가지와 공존하여 얹혀 있는가하며 생장하고 있는 나무 자체가 벤치가 되기도 하고 구획을 나누는 담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박살이 난 화분이 스리랑카에서 자라는 식물의 활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번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 가족모임 Canon EOS 600D 1/150s F8.0 ​ 4월은 스리랑카의 새해입니다. 스리랑카의 내륙 산중에 있는 도시 바둘라에서 새해를 현지인 가족들과 함께 맞이하였습니다. ​ 어른이 잎사귀에 용돈을 싸서 주는 모습 Canon EOS 600D 1/150s F8.0 전통기원 Canon EOS 600D 1/150s F8.0 ​ 4월 중순 2주간의 긴 휴일동안 가족 간 서로의 집을 방문하며 어른들의 발등에 입을 맞추고 손을 모아 합장하는 인사를 드리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에게 코코넛 잎사귀에 돈을 싸서 용돈을 주는 문화는 우리나라의 새해 문화와 놀랍도록 비슷합니다. ​ ​ 눈을 가리고 코끼리 그림까지 가서 코끼리의 눈을 찍어내는 게임 Canon EOS 600D 1/150s F8.0 ​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각자 만든 디저트를 전달하고 가족 파티 중에는 근처에 있는 친구들과 지인들도 함께 불러 가족 외의 사람들과도 어울리는 모습이 우리나라 보다는 좀 더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며 집집마다 전통놀이와 자체적으로 준비한 게임, 폭죽놀이를 하는 등 활동적인 형태로 새해를 즐기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전날 밤에는 우유를 끓여 우유밥을 짓고 집집마다 배치된 불상에 합장을 하거나 교회를 가는 등 종교와 함께 새해를 준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모두 공존하는 스리랑카는 집집마다 기도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조그맣게 마련되어 있는데 이런 공간을 통해 서로 축복을 해주는 모습에서 종교와 생활이 깊게 밀접해 있음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축제기간 내내 폭죽을 터뜨리는 스리랑카 사람들 Canon EOS 600D 1/150s F8.0 ​ 스리랑카 사람들은 특히나 불꽃놀이를 좋아합니다. 2주의 연휴 동안 바둘라의 산중에는 폭죽 소리가 끊이질 않습니다. 이 집에서 펑, 저 집에서 펑, 새해가 온다는 것을 집집마다 알리려는 듯 밤낮을 가리지 않고 터지는 폭죽에 깜짝깜짝 놀라고 위험한 상황도 많이 연출되지만 현지사람들은 그마저도 즐거워하며 더 많은 폭죽을 터뜨리고 있는 모습이 참 순수해 보입니다. ​ 이렇게 풀이 무성한 산속에서 폭죽놀이가 위험하지 않냐고 물어보는 제 질문에 이미 축제기간 전에도 폭죽으로 큰 산불이 났지만 그래도 여전히 폭죽은 스리랑카 사람들에게 떼어 놓을 수 없다는 현지인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 ​ 스리랑카의 노후한 변압기 Canon EOS 600D 1/150s F8.0 스리랑카의 전력공급은 불안정 합니다. 다른 물가에 비하여 전기가 비싼 것도 그 이유인데 하루에 한 번 정전은 기본이고 스리랑카를 입국하는 공항에서도 두 번의 정전이 있을 정도로 시스템이 불안정합니다. ​ 이 때문에 가정집에서는 주간 조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연휴 동안 여러 가정집을 둘러보면서 집안이 어둡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거실임에도 작은 조명 하나를 배치하고 자연채광을 받기 위해 천장이 열린 구조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연휴 기간 전에는 하루에 일정 시간을 정해놓고 전력을 차단하는 등 국가적으로 안정적인 전력 공급에 힘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정전을 대비해 집집마다 비상등은 필수로 배치되어 있고 호텔이나 금융시설에는 비상용 발전기가 배치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의 불안정한 시스템에 적응하여 살아가는 현지인들을 보며 도시 시스템이 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직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 Stations of MATARA Canon EOS 600D 1/150s F8.0 ​ 바둘라에서 느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순수하고 여유로운 모습들이었습니다. 다양한 인종으로 국가가 건립된 만큼 내부의 갈등이 알게 모르게 존재하고 있지만 주어진 자연환경과 더불어 서로를 잘 이해하고 공존하려는 모습에서 공공디자인의 발전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 수도에서부터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빌딩과 구축되는 도시 인프라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성장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스리랑카만의 공공디자인이 어떻게 구축이 될지 기대가 됩니다. 낯선 이방인을 거리낌 없이 맞아주고 가족과 함께 재밌고 새로운 새해를 경험하게 해준 Tharu와 Deshan의 가족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 스리랑카를 다녀온 뒤 기사를 작성하고 있는 지금, 일부 극단적인 단체의 테러로 많은 사상자가 났습니다.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깊은 애도를 표하고 조속한 부상자들의 쾌차를 바랍니다. ​

디자인과 예술의 섬 나오시마! - 2편

나오시마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바다의 역, 미야노우라 항구 세월따라 늙어가던 나오시마 항구는 디자인과 예술로 다시 젊어지고 있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나오시마로 가는 길은 멀고 번거롭다. 우리나라에서는 일단 비행기를 타고 가가와현의 다카마쓰 공항이나 오카야마현의 오카야마 공항에 내린다. 다카마쓰 공항에서는 리무진을 타고 다카마쓰 항으로가서, 오카야마 공항에서는 리무진을 타고 우노 항으로 가서 페리를 이용하면 된다. 필자는 오카야마를 경유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카야마는 일본의 3대 정원 중 하나인 고라쿠엔(後樂園), 에도시대 풍경을 그대로 간직한 쇼핑 거리인 구라시키(倉敷) 미관지구로 유명한 곳이다. 리무진을 타고 차창 밖으로 오카야마 시내를 보며 1시간 남짓 달리다 보면 우노 항에 도착한다. 우노 항에서는 나오시마의 혼무라 지역과 미야노우라 항구로 갈 수 있다. 나오시마에서는 불과 20여 분 밖에 차이나지 않지만 혼무라 지역으로는 작은 배가, 미야노우라 항구로는 자동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가 운항되고 있다. 필자는 미야노우라 항구를 선택했고 시간은 40분 정도 걸린다. 미야노우라 항에 도착해 제일 먼저 만나는 건물은 선박터미널이다. 그리고 <빨간 호박>과 함께 ‘아이러브유(I♥湯)’라는 목욕탕도 바로 근처에 있어 나오시마에 도착하자마자 현대미술을 접하게 되는 셈이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배려가 깃든 마린스테이션 미야노우라 항에 도착하면 거대한 주유소 같은 선박 터미널인‘ 마린스테이션(Marine Station) 나오시마’와 마주하는데 나오시마의 관문 역할을 하는 곳이다. 한 나라나 지역의 관문은 그곳의 첫 이미지를 좌우하며 그 이미지는 오랜 시간 기억 속에 남아 지역의 브랜드로 자리하게 된다. ‘마린스테이션 나 오시마’는 청결하고 구조적인 절제미가 돋보여 인상적이었으며 그곳 직원들 역시 친절했다. 이 건축물은 나오시마의 풍경을 병풍 삼아 수평으로 드리워진 지붕이 눈에 띈다. 또한 밀폐되고 답답한 일상의 건축구조물에서 벗어나 천장재를 제외한 사면을 유리 벽체로 구성하여 터미널을 찾는 손님들에게 항구 풍경을 고스란히 조망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슈퍼밀러 스테인리스 구조를 채택해 항구 풍경을 연장시켰다. 미야노우라 항 구의 선박 터미널인 ‘마린스테이션 나오시마’는 일본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妹島和世)와 니시자와 류에(西澤立衛)의 작품이다. 이들은 건축회사 사나(SANAA)의 동업자로 일본 나가노(長野)의 O-박물관과 가나자와(金澤)의 21세기미술관, 뉴욕 신현대미술관, 스위스 로잔의 롤렉스학습센터 등을 설계했다. 특히 21세기미술관은 미술관의 고정관념을 깬 건축물로 유명하다. 건물 외벽은 모두 유리로 처리돼 투명하게 들여다보이고, 둥그런 건축물 사방으로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또한 ‘앞뒤 구분이 없는 미술관’으로 설계해 관람객들은 건물 모든 방향에서 들어갈 수 있고 전시물도 정해진 동선 없이 자유롭게 골라 볼 수 있도록 배려했다. 두 건축가는 이 같은 파격적이고도 단순미와 절제미가 돋보이는 건물 디자인을 ‘마린스테이션 나오시마’에도 그대로 적용해 나오시마의 이미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또한 세토 우치국제예술제에서 세지마 가즈요는 이누지마 섬의 민가 네 곳을 집 프로젝트를 통해 작품으로 만들고, 니시자와 류에는 데시마 섬에 미술관을 건립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미니멀리즘으로 대변되는 나오시마 전체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이곳의 실내외를 살펴보면 사소한 곳까지 배려가 넘치는 현대건축의 기법과 디자인을 만날 수 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이곳에서는 나오시마 섬을 운행하는 셔틀버스 ‘나오시마 마이버스’를 탈 수 있다. 버스에는 나오시마의 상징인 <노란호박>과 페리, 벚꽃이 그려져 있어 이곳이 나오시마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나오시마의 랜드마크 빨간 호박 예술작품과 항구를 조합한 구사마 야요이 Kusama Yayoi 멀고 지루한 여정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에 대한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익히 들어왔던 것에 대한 반가움의 표현 때문인지 항구에 도착할 무렵 멀리서 <빨간 호박>이 보이면 페리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른다. 페리의 안쪽에 앉아 있어도 사람들의 술렁거림에 나오시마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페리에서 내리자마자 일제히 달려가 사진을 찍는다. <빨간 호박>은 세계적인 설치미술가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으로 베네세하우스 근처 방파제에 있는 <노란 호박>에 이은 두 번째 <호박> 작품이다. 두 <호박> 모두 빨간색과 노란색의 원색에 검은색 물방울 무늬가 그려져 있다. 반면 <빨간 호박>은 <노란 호박>보다 큰 데다 크게 뚫린 구멍 안으로 들어가 눈높이의 작은 구멍으로 바다 풍경도 볼 수 있어 한층 더 친근감이 든다. 이처럼 상징적 조형물은 기존의 건축환경의 정면에 내세워 상징성만을 이야기하는 의무적인 설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바라만 보는 조형물에서 시민들과 소통하고 교감하는 조형물로 발전되어야 하는 것이다. "구사마 야요이의 작품이 재미있는 것은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공간이 된다는 점이다. 나오시마에 구사마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과제였는데 결국 사용하지 않는 부두에 설치했다. 호박이 설치됨으로써 방파제와 바다의 풍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 출처-『나오시마, 세토 내해 예술의 낙원』, 아키모토 유지ㆍ안도 다다오 외 저, 일본 신초사 도시환경을 위한 미술품은 개인의 예술적 표현도 중요하지만 일상의 생활환경을 구성하는 요소인 만큼 그 주변 환경과도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환경미술, 환경조형미술로도 불리며 현대도시 공간 안팎에서 마주하는 미술품들은 전시장 이외의 장소에 위치하면서 또 다른 미술 장르로 인식되고 있다. 현대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도시의 시각적 언어로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항구에 웬 생뚱맞은 호박이란 말인가?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보인다. 그런데 가만 보면 또 썩 잘 어울린다. 이는 어떤 물건을 일상적인 환경에서 전혀 다른 환경으로 옮겨 기이한 만남을 연출하는 미술 기법인 ‘데페이즈망(Depaysement)’으로 설명할 수 있다. 강렬한 원색과 물방울무늬가 호박이라는 사물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질을 사라지게 하고 대신 방파제 위에서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오히려 밝고 경쾌한 느낌을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구현한 대표적인 작가로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를 들 수 있다. 그는 성채에 거대한 나무뿌리를 붙여놓거나, 야구하는 사람들 위로 거북이가 헤엄치고 있거나 하는 식으로 전혀 이질적인 것들을 결합, 혹은 고립시키는 방법으로 데페이즈망을 표현했다. 관광객들은 <빨간 호박> 앞에서 사진 찍고, 안으로 들어가서 사진 찍고, 조그만 구멍으로 고개 내밀고 사진 찍고 하는 것으로도 뭔가 아쉬움을 느끼는지 아예 호박 위로 올라가보려고 다리를 치켜 올린다. 물론 작품을 손상시키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조형물 하나에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고 감동을 받는 경우는 드문 일이다. <빨간 호박>은 특별한 건축물 하나만을 위해 작업하는 근시안적 미술 장식품의 개념에서 탈피하여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문화 공간 가꾸기 차원에서 공공미술의 기능을 발휘한 좋은 사례이다. 조각품이나 조형물은 사진이나 회화 작품과는 달리 일정 공간에 계속해서 고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오히려 더 높은 수준의 공공성이 요구되는데, 이를 적극 반영했기 때문에 관광객들의 인기를 한 몸에 얻고 있는 것이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베네세하우스에 자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헤어졌던 오타니 사토코 의원이 그대로헤어지기가 아쉬웠던지 다음 날 내가 묵고 있던 민박집으로 찾아왔다. 우리는 아침을 같이 하고 길을 나섰다. 이틀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친구가 되었기 때문일까? 이런저런 많은 일을 제법 경험한 나이인데도 이별은 여전히 힘들다. 오타니 의원, 나오시마 주민들, 그리고 나오시마를 뒤로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멀어져가는 미야노우라 항구의 <빨간 호박>을 바라보고 있자니 종종거리며 걷는 구사마 야요이의 얼굴이 스쳐가며 머지않아 또다시 이곳을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친환경 생태마을을 꿈꾸며 어촌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해수부가 선정한 2019 ‘어촌뉴딜300’ 사업대상지 70개소는 지금쯤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까요? -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