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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예술의 섬 나오시마! - 1편

나오시마

​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500s F7.1 ​ "버려진 섬마을이 아닌 디자인을 위해 비워두고 예술의 공간풀이를 위해 아껴둔 섬 나오시마" ‘현대미술의 천국!’ ‘섬 전체가 미술관’ ‘시간이 멈춘 섬’ ‘예술의 성지’ … ​ 모두가 나오시마를 수식하는 단어들입니다. 이 수식어들은 나오시마가 아직 낯선 이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미 나오시마를 다녀온 이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며 아련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 2011.2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400s F7.1 창조마을 나오시마를 만나며! ​ 책을 읽다가 또는 영화를 보다가 그동안 방문했던 세계 각국의 도시들과 마을들이 나오면 무척이나 반갑고 기쁩니다. 방랑벽이라도 있기나 한 건지 필자는 습관처럼 세계 디자인 기행을 떠납니다. 인문사회학의 바탕이 되는 고대 문명의 도시, 비우고 정리할 엄두가 나지 않아 차라리 채워서 아름다운 도시, 공공디자인이 적용된 친환경 생태도시 디자인과 예술, 사회, 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공공디자인을 살필 수 있었습니다. 세계의 도시들은 저마다 독특하고 차별화된 전략으로 경제 지향적인 문화도시를 꿈꿉니다. 지도 한 장이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 영국의 브라이튼, 문화유산을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예술과 경제는 하나임을 외치는 스위스의 루체른, 보존과 개조를 통해 도시를 재생시킨 독일의 에슬링겐을 비롯해 일본 요코하마의 창조 공간인 미나토미 라이21과 문화예술을 중심으로 한 창조 지역 형성의 기폭제가 된 뱅크아트1929는 유명한 사례입니다. - 정희정 나오시마디자인여행 2011 ​ ​ 오늘날 사람들은 독특하고 차별화된 도시와 마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 정보로는 충족되지 않은 현장을 체험하기 위해 직접 방문합니다. 그 후 이들은 글과 그림, 사진 등으로 특성화된 도시와 마을을 지구촌 곳곳에 빠른 속도로 파생시키며 또 다른 방문자들을 불러들이는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80s F4.5 ​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오시마를 다녀왔습니다. 필자가 체험한 나오시마는 소소한 배려가 깃든 현대건축과 함께 예술과 디자인이 스며들어 있어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했습니다." Canon EOS 5D 24-70mm F8.0 1/500s ​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은 청결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조그마한 간판들은 작은 목소리로 손짓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원도 가꾸고, 자원봉사도 하며 친절한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렇게 나오시마의 마을풍경은 예술과 건축물과 사람들이 만나 사색의 공간으로 충만했습니다. ​ 세상에는 보여주는 것과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잘 치장하고 다듬어 자신있게 보여줄 수 있는 것과 아무런 준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보이는 것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계의 도시들을 기행하며 공공의 영역에 디자인적 요소를 첨가하여 도시환경을 바라보고 해석할 때도 있지만, 화장기 없는 맨얼굴이 더 편안해 보이는 것처럼 가끔은 그렇게 도시를 생각하고 담아보기도 합니다. 다듬어지고 잘 정비된 도시보다 때론 시간의 때가 묻어나는, 세월의 두께가 내려앉은 고색창연하고 오래된 도시가 인간답고 정감이 가기도 합니다. ​ 공공디자인 전문가로서 고민해 봅니다. ‘보기 좋게 잘 다듬어진 도시 환경과 늘 더디게 진행되는 도시환경 중 정작 인간의 본질적인 편안함은 어느 쪽에 무게가 실리는 것일까?’ 단연 나오시마는 후자에 속한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70-200mm 1/250s F5.6 ​ ​ 200~400년 된 고택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고, 화려한 장식 요소가 없는 현대건축물은 자신을 내보이지 않고 자연의 품에 안겨 있으며, 마을 사람들 또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고 들뜨는 대신 고즈넉한 분위기를 지킵니다. ​ ‘현대미술의 천국’ ‘섬 전체가 미술관’ ‘시간이 멈춘 섬’ ‘예술의 성지’……. 모두가 나오시마를 수식하는 단어들입니다. 이 수식어들은 나오시마가 아직 낯선 이들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이미 나오시마를 다녀온 이들에게는 추억을 떠올리며 아련한 미소를 짓게 합니다. ​ 나오시마는 둘레가 16km인 조그마한 섬으로, 오카야마(岡山) 현과 가가와(香川) 현 사이의 세토(瀨戶)내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한때 제련업과 제염업을 중심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결국 이들 공장의 폐기물로 몸살을 앓게 되 기도 합니다. 산업혁명 이후 각광받던 제조업이 오염물을 쏟아내며 자연환경을 파괴하는 주범이 된 것입니다. ​ 2011.7 Canon EOS 5D Mark Ⅱ24-70mm 1/250s F5.6 ​ 이로 인해 외부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긴 것은 물론 주민들마저 하나둘씩 떠나는 아픔과 고통의 시간을 경험하지만 이후 치유하고 재생하기에 이릅니다. 이 섬마을을 다시 살린 치료법은 다름 아닌 현대미술과 디자인이었습니다. 일본의 교육•실버 기업인 베네세그룹의 후쿠다케 소이치로(福武總一郞 )회장이 이 섬에 관심을 갖고 현대미술로 되살리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구상한 것입니다. 프로젝트명은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 그 계획에 따라 자연에 거스르지 않는 미술관이 지어지고, 자연을 모티프로 삼은 예술품이 자리를 찾아 들어서게 됩니다. ​ 오래된 집 역시 철거하지 않고 작업 공간이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전통은 현대 건축을 수용하고 양보하며 현대건축은 전통을 지켜주고 배려한다는 적극적인 사고의 소통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덕분에 마을에는 변화가 생겼다고 합니다. 다시 생명수가 흐르고,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되돌아오고, 오염되었던 섬은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쓰레기 소각장 건설을 허락하여 인근 섬인 데시마(豊島)에서 해상 수송한 산업폐기물을 무해화하여 처리할 정도로 의식 수준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200s F6.3 <전 세계에서 유일한 땅속 미술관인 지추(地中)미술관 입구> ​ ‘나오시마 아트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예술작품들로 가득한 호텔과 미술관이 어우러진 베네세하우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땅속 미술관인 지추(地中)미술관, 미니멀리즘의 대가로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이우환 작가의 작품으로만 구성된 이우환미술관이 있습니다. ​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250s F8.0 <이우환미술관 전경> ​ 그리고 세계적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이들 미술관의 설계를 맡아 시멘트가 주재료인 콘크리트와 자연이 선물한 빛으로 전시 작품과 나오시마의 절경을 돋보이게 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게 됩니다. 우리의 많은 지자체들이 나오시 마를 벤치마킹하여 폐가들을 활용하고 재생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2011.7 Canon EOS 5D Mark Ⅱ 24-70mm 1/400s F10 <세토(瀨戶)내 해 전경> ​ 이 기행문을 통해 공공디자인 도시재생 어촌뉴딜 일반농산어촌 지역개발 사업 등을 진행하는 산 • 학 • 민 • 관 • 연의 전문가를 비롯 디자이너와 예술가, 정책을 펼치는 행정 관료, 그리고 일반 시민들에게 나오시마를 소개하는 것은 물론 디자인과 예술에 대한 이해를 돕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근본이 되어야 할 배려와 친절을 알리고자 합니다. 그래서 풍요롭고 아름다우며 살기 좋은, 더 나아가 유명해지고 경쟁력을 갖춘 도시 혹은 마을이 만들어지길 소원합니다. ​ 어촌의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해 해수부가 선정한 2019 ‘어촌뉴딜300’ 사업대상지 70개소는 지금쯤 어떤 작업을 하고 있을까요? - 편집인

베트남의 중부도시 '다낭'

Canon EOS 5D 24-70mm F8.0 1/500s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어느 해부터인가 베트남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람들이 베트남으로의 여행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Canon EOS 5D 24-70mm F8.0 1/500s ​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추자님의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네~’를 들으며 꽤나 오랜 시간 월남전의 무시무시한 전쟁담을 풍문으로 들어오며 월남전이 없었으면 전쟁영화는 무슨 주제로 만들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참혹한 베트남전쟁의 이야기들은 영화로 뮤지컬로 노래로 회자되었습니다. ​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월남전의 포화 속에 꽃피운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들과 노래가 많은 듯 합니다. 1985년 영국신문에 실린 낡은 흑백사진 한 장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로 전쟁 속에서 베트남여인 킴과 미군 파일럿 크리스의 아름답지만 비극적인 이야기로 혼혈인 아이만이라도 풍요로운 미국 땅으로 보내기위해 이별을 택한 베트남여인 킴의 슬픈 이야기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 한국영화에는 묵직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를 배경으로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라는 노래를 부르며 여린 한국의 여인이 말도없이 베트남전쟁에 지원해 떠나버린 남편을 찾아 베트남을 찾아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사랑이야기를 그려낸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가 생각납니다. ​ 월남이라고 기억됐던 베트남은 필자에게는 어렸을 적 상이군인 아저씨들의 월남전때 베트콩들과 싸우는 무용담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그저 막연한 미지의 나라로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Canon EOS 5D 24-70mm F8.0 1/500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으로 여행을 다녀온 후 사업의 무대로 확장시키는것도 많이 보았습니다. 근래 들어서는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다는 여행지며 연인끼리 친구끼리 가족끼리 자유여행을 떠나는 베트남 중부도시 다낭! ​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칠리 없듯이 필자 또한 베트남 쌀국수를 먹으며 식당 벽에 걸린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들과 베트남의 풍경들을 마음속에 담고있던터 지난해 혹한의 한국 겨울을 뒤로하고 다낭기행을 다녀왔습니다. Canon EOS 5D 24-70mm F8.0 1/500s 짧은 시간이었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순박하고 그 근성이 착했습니다. 열심히 일하면서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좋아했습니다. ​ 최근에는 베트남 축구 대표 팀을 아시안컵 8강까지 끌어올려 베트남의 국민영웅이 된 박항서 감독의 영향으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는 분위기입니다. ​ 월남전! 베트남전! 북베트남! 남베트남! 베트콩!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을 상징하는 많은 단어들로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간단한 역사를 풀어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역사를 알아야 그 나라의 문화를 알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자주 받게 됩니다. 베트남의 기독교탄압을 계기로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편입되었습니다. ​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고 2차 세계대전으로 1940년부터 약 5년간 일본군이 진주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호찌민이 독립선언을 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설립 베트남 독립을 반대하는 프랑스와 대항해 항불 전쟁을 치러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기도 합니다. 1945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 와중인 1950년 베트남은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을 설립하고 동구권 국가들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 ​SAMSUNG S-8 F1.7 4.2mm 1.958S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의 인도차이나 반도 동부에 위치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외국의 침략과 지배를 자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통일 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 침략과 지배 속에서 베트남은 여러 유형적 문화자원을 생산해 내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관광자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관광 콘텐츠로 채워져 세계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Canon EOS 5D 24-70mm F8.0 1/500s)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 끝나며 베트남은 북부와 남부로 분단되게 됩니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남부 베트남공화국 과 베트콩으로 불리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마찰로 1965년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며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베트남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한국,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뉴질랜드 등의 도움을 받아 전쟁을 계속했지만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제압하기에는 무리였습니다. 그리하여 1973년 휴전협정을 하였으나 북베트남의 전투 재발로 2년 정도의 전쟁을 또 치룬후 남베트남이 항복하게되었고 이후 베트남이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일되면서 비로소 베트남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패배한 최초의 전쟁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은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통일 국가를 건설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지켰습니다. 외세의 침략과 지배 속에 베트남은 여러 유형적 문화자원을 생산해 내게 되었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관광자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관광 콘텐츠로 채워져 세계인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는 다낭!" 이제 참혹한 전쟁이야기는 막을 내리고 베트남 중부 도시로의 기행을 합니다. ​ 베트남의 중부도시는 다낭, 후에, 호이안 등이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모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저마다 독특한 색과 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베트남 역사에서는 기원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트남 기행 중 일정 상 가보지 못했으나 대리석이 많이 나서 ‘마블마운틴’이라고 불리는 오행산이 있다고 합니다. 동양의 오행사상에 기초한 오행산은 유명한 서유기의 제천대성[齊天大聖]이라 불리는 손오공이 석가여래의 법력으로 바위에 500년 동안 갇혀있던 곳입니다. ​ 다낭은 중부 최대의 상업도시이자 하노이 호치민에 이어 베트남 제3의 도시로 도둑, 문맹자, 극빈자, 거지, 마약 소지자가 없다고 하여 오랜 옛날부터 5무[五無]의 도시로 명명되며 오늘날 베트남에서 가장 치안이 안전하다고 합니다. ​ ​ SAMSUNG S-8 F1.7 4.2mm 1/958s, NOVOTEL에서 바라 본 다낭의 시내전경 ​ SAMSUNG S-8 F1.7 4.2mm 1/958s "바나힐국립공원 중세 프랑스의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 하루에 4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는 곳" ​ 다낭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해발 1,500미터를 케이블카로 이동해 올라가다 보면 울창한 열대우림과 폭포의 경치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아침에는 봄, 낮 동안은 여름, 오후에는 가을을 그리고 저녁부터는 겨울이 되는 하루에 4계절을 모두 경험할 수 있습니다. ​ SAMSUNG S-8 F1.7 4.2mm 1/95 ​ SAMSUNG S-8 F1.7 4.2mm 1/958s ​ 바나힐은 중세 프랑스의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로 과거 프랑스지배 시절 무더운 베트남의 날씨를 피하기 위한 프랑스인들의 휴양지로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고산지대로 평균기온이 15~17도로 베트남의 무더위를 피하기에 최적이였다고 합니다. ​ 이국적인 테마파크는 울창한 밀림의 경관 속에 사원과 박물관도 있으며 플라워가든이 있습니다. 편집인이 방문했던 날에는 비가 많이 내렸었고 추웠지만 비를 맞으면서도 플라워가든과 판타지 파크 등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즐기는, 세계에서 몰려온 다양한 사람들의 물결속에서 다낭의 문화를 체험하였습니다. ​ SAMSUNG S-8 F1.7 4.2mm 1/958s 베트남화페 2만동 호이안 호이안의 옛거리[올드타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16~17세기 해양 실크로드의 주요 항구 도시였던 호이안은 무역도시로 발전하였고 당시에 머물던 중국과 일본 상인들의 지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거리 곳곳에 그 흔적의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습니다. ​ SAMSUNG S-8 F1.7 4.2mm 1/958s 이곳에는 일본과 교역이 많아 일본인마을이 있었으며 1953년 일본인들이 세운 ‘내원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목조지붕의 구조로 만들어진 이 다리는 전세계적으로도 보기드문 매우 가치가 높은 다리로 베트남의 화폐 2만동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 오랜 시간 다양한 문화적 가치가 인정돼 베트남에서 세 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호이안의 옛 거리[올드타운]는 낮시간으로는 부족해 야간이 되면 등불을 밝혀 강에 띄우며 소원을 비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룹니다. ​ 석양이 아름답고 조목 조목한 야경으로 가슴 설레게 하는 곳! 그래서 다시가고 싶게 하는 곳 다낭입니다.

스페인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Recuerdos de la Alhambra

"역사가 깊을수록 사연이 많을수록 절절한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청운대학교 교수 정희정 디자인학 박사 <알함브라 궁전에서 본 그라나다 전경/Canon EOS 5D 24-70mm F8.0 1/500s> 그라나다에 도착하셨습니다! 알함브라 궁전에 오셨습니다! ​ 느릿한 어느 주말 밤! 우연히 tvN에서 방송하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 낯익은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더듬어 보니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영화 ‘킬링필드’의 주제가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던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의 기타연주곡입니다. ​ 800년 찬란한 역사속 건축물들과 드라마틱한 스페인의 길거리를 배경으로 가상의 이미지들을 덧씌워 만든 증강현실(AR)의 기법들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렌즈를 착용해야만 진행 할 수 있는 게임이지만 렌즈를 끼지 않아도 현실에서 게임이 실행되는 버그를 해결하기 위한다는 첨단과학의 부작용을 예시하며 역사적 건축과 첨단과학 그리고 음악을 접목시킨 드라마의 구성력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 드라마는 대략 증강현실 게임 회사의 대표 유진우(현빈)가 비즈니스 관계로 그라나다에 갔다가 과거 기타리스트였던 정희주(박신혜)가 운영하는 ‘보니따호스텔’에 묵게 되면서 희주 동생 세주(찬열)가 개발한 증강현실(AR)게임을 사들이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재미난 이야기들도 시작됩니다. 몇해전 기행했던 아름답던 스페인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 유럽서남부 이베리아 반도에 위치한 스페인은 과거 에스파냐(Espana) 또는 이베리아(iberia)라는 옛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인구의 94%이상이 카톨릭이며 역사상 단 한번도 카톨릭을 부정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Madrid) 현지에서 구입한 도서 김준한 편역 똘레도-마드리드의 역사와 예술에서 소개하는 전설을 살펴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8세기 이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기 시작한 이슬람 왕국은 그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고 마드리드를 포함한 중부지방은 술탄 모하메드 1세때인 873년 아랍인들은 현재의 왕궁이 있는 언덕에 뚤레도를 수비하기 위한 요새를 만들었는데 이곳을 ‘물의 근원’이란 뜻의 마헤리트(Mayrit)라 불렀으며 그 이름이 마드리드라는 기원이 되었다. ​ 이후 이사벨 2세때 마드리드에는 많은 궁과 공원 거리들이 만들어졌다. 16세기 초부터 17세기 초 사이에는 세계를 제패하고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나 영국과 나폴레옹1세의 침입 등으로 혼란의 시기를 거슬러와 현재는 도시의 소중한 건축물들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법들이 제정되고 있으며 오래된 건물의 보존에 대한 가치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 "스페인의 영혼을 되살린 타레가! 기타의 사라사테로 부리우는 기타의 현대적 연주법을 완성한 스페인의 기타리스트 타레가! 타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Francisco Tárrega Recuerdos de la Alhambra" 붉은궁전 알함브라 ​ 에스파냐에 존재했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무하마드 1세 알 갈리브가 13세기 중반에 세우기 시작한 이후 증축과 개보수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알함브라 궁전은 세계적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한 건축물로 스페인여행에서는 필수 코스입니다. 현재의 모습들은 14세기 완성된 것으로 자연과의 조화와 특유한 인공미를 뽐내는 아름다움으로 800년간 이슬람문화의 결정체로 남아있다고 합니다. ​ 드라마의 OST인 알함브라의 추억을 연주하는 타레가는 경이적인 테크닉과 연주스타일로 기타라는 악기로 세계적인 인지도를 받았으며 다른 악기에 밀려 사라질 운명에 놓였던 기타의 재발견을 이루어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의 물결속에 특이점을 보이지 않던 스페인 음악을 조명하게 했다고 합니다. ​ 특히나 연못에 비친 궁전의 모습이 절경입니다. 한편 이야기속에서는 짝사랑하는 여인을 그리며 스페인을 여행하던중 달빛이 드리워진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빠져 자신의 사랑을 떠올리며 작곡했는데 그 애잔한 분위기와 낭만넘치는 멜로디는 알함브라 궁전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음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역사가 깊을수록 사연이 많을수록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 드라마 알함브라의 추억을 보면서 스페인의 한국인 관광증가를 예감하며 한편으로는 스페인의 한류를 예감합니다! 아직 스페인을 가보지 못하신 독자분들께 그리고 스페인을 가고자 꿈꾸는 독자분들께 타레가,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Francisco Tárrega Recuerdos de la Alhambra)을 전합니다. 2월호에 계속됩니다.

찬란한 역사와 신비로운 문화! 형제의 나라, 터키 - 2편

형제애의 위기를 기회로!

형제애의 위기를 기회로! “터키의 지진” 터키는 신이 사랑한 나라라고도 합니다. 땅이 비옥하고 사계절과 과일 그리고 야채가 풍부하지만 100년을 주기로 대지진이 일어납니다. 1999년 8월 26일 동아일보 사회면을 인용하면 1999년 8월 17일 새벽 터키 서부에 리히터 규모 7.4의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데 이어 24일 오후에는 수도인 앙카라 부근에 규모 4.7의 지진이 또 발생합니다. 서부 이즈미트등 17일 지진의 피해가 컸던 지역에는 24일 이틀째 폭우가 내려 생존자 구조와 시체 발굴이 중단됐으며 구호품 보급에도 큰 차질이 생겼다고 전했습니다. 20만 명의 이재민이 머물고 있는 천막촌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었으며 구호품 지급도 일시 중단돼 이재민들은 더욱 참혹한 처지에 놓였다고 합니다. 터키의 강진은 당시 러시아 경제위기 여파로 곤란을 겪고 있던 중이라 중소기업들을 거의 궤멸시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99년 8월 27일 한겨레신문을 살펴보면 17일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는 24일 오후 까지 1만 8000여명 부상자는 4만 2000여명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이 무렵 지구촌은 이상기후로 자연재해가 빈번하여 선진국들의 원조비율이 감축되고 특히 끊임없이 내전과 가뭄 등으로 인위적 자연적 재해를 동시에 겪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해 세계는 동정피로를 느끼면서 외면과 국제 구호활동 계획이 축소되거나 변경되기도 하는 등 모금의 양극화 현상이 있었던 때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터키 여행 중 17년째 거주중인 한인이 슬픔에 잠겨 말하던 음성과 표정이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지진으로 인하여 전 세계에서 터키로 구원자금을 보냈는데, 한국정부에서 보낸 금액이 7만 불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환율로 보면 한화로 7,000만원인 셈입니다. 당시 일본은 한국보다 100배나 많은 600만 불을 지원하였고 대만이 250만 불을 그리고 전 세계 최빈국인 방글라데시가 10만 불을 국가차원에서의 구원자금으로 보냈다 고하니 한국 지원금이 제일 후순위라고 합니다. 이 사실을 신문에서 접한 터키와 관련된 한국 학자 분들이 금액이 잘못 나온 것이라 생각하고 동그라미 두 개 정도는 빠졌겠다 싶어 확인을 하기도 했다는 후문도 있었다고 합니다. 터키정부에 구원자금을 전달한 현지 공관장은 다른 나라의 지원 금 액을 알아보고 낯이 뜨거웠다고 합니다. 터키를 도웁시다! 한겨레신문 1999년 8월 27일에 의하면 이 무렵 주한 터키 대사관은 20일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낳은 터키 지진과 관련해 한국인의 성금을 모집한다고 한국의 국민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국의 학자, 언론, 의료인, 연예인, 방송인들이 콘서트와 바자회를 통하여 모금운동기간 기업체의 후원을 거절하고 국민의 순수한 모금운동을 하였는데 그 이유로 한국정부와 한국국민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기로 한국인들의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당시의 신문과 언론을 살펴보면 국제사회 아픔에 동참합시다! 터키의 아픔 함께 보은의 물결! 사랑해요 힘내세요! 왜 터키를 도와야하나! 그들이 우리를 도왔듯이! 다양한 제목으로 자발적 터키 돕기 운동 확산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키 재앙때 보여준 한국 정부의 태도는 국제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부끄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국경과 이념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개념이라는 신념에서 우방인 터키의 불행에 대한 우리 정부와 국민의 인식이 지나치게 미흡하다는 생각과 터키는 우리가 어려울 때 피를 흘리며 도와준 ‘형제의 나라’ 임에도 이번 재앙을 그저 먼 나라의 일로만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 “우방국 터키의 불행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순수 민간주도가 결성”되었고 “터키국민에게 마음 전해줄터” 라는 다양한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의료봉사단이 구호활동에 참여했으며 터키를 돕고싶다며 성금기부 방법을 묻는 전화가 꼬리를 물며 국민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일고 있는 보은 과 인류애의 실천에 대한 민간차원의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일차적으로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터키에 대한 보은의 의미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이것은 단순히 빚을 갚는다는 보은의 차원을 넘어서 지구촌 이웃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고귀한 인류애의 실천이었습니다. 터키의 방송국 STV 에서는 일주일 동안 한국에서 펼쳐지는 터키지진 전 국민 돕기 다큐를 찍고 돌아갔으며 이 방송은 50분 동안 터키의 전역에 방송 되고 이를 지켜본 터키국민들은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당시 40일 동안 많은 국민들의 노력으로 23억을 마련했고 정부가 보낸 7천만 원과 국민이 만든 23억을 통해 비로소 한국이 은혜를 모르는 민족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국민의 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2002월드컵 터키와 한국의 사랑 터키인들이 한국에 대해 서운했을 때가 두 번 있었다고 합니다. 한 번은 88 서울 올림픽 때였고 두 번째는 1999년 터키 지진 때의 한국정부 지원금이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에 터키의 한 고위층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자신을 터키인이라 소개하면 한국인들에게서 큰 환영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은 데 대해 놀란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물었다고 합니다. ‘터키라는 나라가 어디있는지 아십니까?’ 돌아온 답은 대부분 ‘아니요’였고 충격을 받고 돌아간 후 그는 자국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고 합니다. 이런 어색한 기류가 급반전된 계기가 바로 2002 월드컵이었습니다. 형제의 나라 터키를 응원하자라는 내용의 글이 인터넷을 타고 여기저기 퍼져나갔고 터키 유학생들이 터키인들의 한국 사랑을 소개하면서 터키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 증폭되게 되었습니다. 6.25 참전과 올림픽 등에서 나타난 터키인들의 한국 사랑을 알게 된 한국인들은 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터키의 홈구장과 홈팬들이 되어 열정적으로 그들을 응원했습니다. 한국과 터키의 3,4위전이 열리던 당시 자국에서 조차 본 적이 없는 대형 터키 국기가 관중석에 펼쳐지는 순간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터키인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경기는 승패에 관계없이 한국 선수들과 터키 선수들의 즐거운 어깨동무로 끝이 났고 터키인들은 승리보다도 한국인들의 터키사랑에 더욱 감동했으며 그렇게 한국과 터키의 ‘형제애’는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유전학이나 인류학적으로도 터키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몇 안되는 북방계 몽골리언국가(몽고, 한국, 일본, 에스키모, 인디언)중 하나로, 헝가리 와 함께 북방계 몽골리언의 유전자가 많이 남아있는 유럽 국가이지만 몽고반점이 있으며 같은 우랄알타이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지만 통일신라시대 이후 우리는 중국의 영향으로 한문을 사용했고 터키는 아랍의 영향을 받아 언어는 전혀 다르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년 월드컵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 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한국제품 수입을 2003년 59%, 2004년 71%나 증가시킨 나라가 바로 터키입니다. 2002년 6월 29일 월드컵 경기당일 붉은악마를 필두로 경기장 입구에서부터 소형 터키국기를 배포하는 등 자발적인 서포터가 이루어지고 경기에 앞서 터키의 애국가가 울릴 때 경기장에서는 엄청난 환호와 더불어 초대형 터키국기가 등장합니다. 더불어 관중석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터키국기를 들고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월드컵 4강 경기에 앞서 상대편 국가를 이처럼 환영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담겨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선수들은 이런 팬들에게 보답하듯이 멋진 경기를 보여줍니다. 한국은 3대 2로 아쉽게 경기에서 졌지만 관중석에서는 다시 한 번 터키의 초대형 국기가 등장했고 그 위에는 보다 작은 태극기가 등장합니다. 양 국가 선수들은 서로 손을 잡고 관중들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기도 하고 터키 대표 팀의 툰카이 선수는 자신의 아들을 그라운드에 데리고 와서 함께 달리기도 했습니다. 1월호에 계속됩니다.

찬란한 역사와 신비로운 문화! 형제의 나라, 터키 - 1편

우리가 바라보는 터키와 터키인들이 바라보는 한국의 차이에 대하여 터키로의 기행에 앞서 터키의 역사에 대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터키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몇 가지의 공통적인 이야기에 대하여 궁금해 합니다. 서로를 동맹국이라 부르지 않고 형제국이라 부르는 나라. 그 궁금증과 사연들을 터키에 오래 거주한 한인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청운대학교 교수 정 희 정 디자인학 박사 형제국가 터키는 과거 청동기시대인 배달국, 고조선, 부여 시대에는 동이족에 속해 있다가 고구려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고구려가 부여를 정벌하자 그 곳에 살던 원주민(예맥 동이족)들이 요하를 건너가 이루게 된 민족으로 면적 783,562㎢ 세계 37위 (CIA 기 준)인구 약 80,694,485명 세계 17위 (2012CIA 기준) GDP 8172억$ 세계 17위 (2012 IMF 기준) 국민의 99% 가 이슬람교입니다. 동로마 제국령이었으나 11세기 이후 셀주크투르크의 등장으로 차차 이슬람화 하였으며 13세기 말 성립된 오스만투르크 제국(1297~1922)은 16세기에 아시아 ∙ 유럽 ∙ 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떨쳤던 터키는 아시아 대륙 끝자락에 자리하며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유럽과 마주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의 두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색깔과 신비로움으로 최근 들어 재조명되며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터키, 한국이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터키인들은 자기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과거 고구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족:(突厥 族)’이라는 나라로 우랄알타이계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동맹 을 맺어 가깝게 지냈는데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결국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과거역사를 거슬러 살펴보면 국가 간은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는 관계의 연속이지만 돌궐과 고구려는 계속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 계를 유지했으며 터키인들은 고 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여전히 ‘형제의 나라’ 라고 부르고 있 으며 저자가 터키를 기행하며 만 나본 터키인들은 한국인들에게 매우 친근감있는 표정으로 대해 주었습니다. 우리를 형제국이라 부르는 이유에는 교육의 차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중 ∙ 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해석하고 우리는 중국의 입장에서 본 역사를 배웠습니다. 돌궐이 중국의 변방국가로서 중국을 괴롭히는 야만국가라는 정도 외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이며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교육의 차이가 작용되어 한국에서는 잊혀졌지만 돌궐과 고구려의 동맹 이후로 터키는 지속적으로 한국을 형제의 나라라 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터키가 한국전쟁 때 한국을 지원하므로써 한국에서 잊혀져 있던 터키는 다시 ‘형제의 나라’로 재조명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터키의 언어에는 우리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다고 합니다. 또한 말뿐 아니라 음식, 문화, 습성, 국민정서도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돌궐의 공주 와 결혼하였으니 터키와 고구려는 그냥 우방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형제의 나라! 터키! 한국의 경제성장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나라, 2002 년 월드컵 당시 터키전이 있던 날 한국인에게는 식사비와 호텔비를 안받던 나라.. 월드컵 때 우리가 흔든 터키 국기(國旗)가 터키에 폭발적인 한국 바람을 일으켜 그 후 터키 수출이 2003년 59%, 2004년 71% 나 늘어났다는 KOTRA 통계가 있습니다. 에게 해를 건너는 페리에서 우리 일행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던 터키인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넸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받으며 제일 먼저 묻는 말이 “한국인인가” 이었습 니다. 그렇게 우연히 만난 한국전 참전군인 아들과 에게 해를 건너는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영어로 나누는 대화였지만 서로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충분하고 넉넉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창한 화법은 아녔지만 서로가 마음을 열고 나누는 대화는 충분히 통했습니다. 필자는 한국전에 참전해준 터키인들 그리고 당신에게도 고맙다고 정중하고 깍듯하게 인사했습니다. 한국전쟁에서 터키군의 주요전투로는 중공군의 공세를 3일이나 지연시킨 군우리 전투도 있지만 철의 무적연대라고 불리던 중공군 연대를 물리친 금양장리 전투에서 는 중공군 사상자 1,900명 터키군 사상자 12명의 대승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는 한국공원이 있습니다. 터키는 50~53년 전쟁 기간 중 14,936명의 병사가 참전 724명이 사망하고 171명이 실종됐으며 2,147명의 부상자와 229명의 포로를 남겼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사망한 1,000여 명의 터키군인들의 기념탑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곳을 방문했을 때 돌에 새겨진 전사자들의 이름을 손으로 더듬으며 아주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한국을 위하여 싸우다 한국의 땅에 묻히고 남겨진그들의 가족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있다 돌아왔습니다. 2004년까지는 초라했으나 한국전쟁 후 한국의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하고 나서 공원을 깨끗하게 정리해서 그나마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에 참여했던 터키인들은 지금은 할아버지가 되었는데 그들은 본인들을 ‘코렐리(한국인)’ 라고 스스로 부르며 한국을 사랑합니다. 국제회의에서 한국을 가장 많이 지지하는 국가가 터키라고 하니 그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12월호에 계속 됩니다.

한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

한달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디로 떠나고 싶은가.

‘한달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디로 떠나고 싶은가’ 얼마전 어느 항공사의 핫한 광고 카피이기도 했던 이 질문을 받고, 혹시 무심코 머릿속에 떠오르는 도시가 있는가. 최근 ‘생활관광’을 연구중인 나로써는 매우 애정을 가지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생활관광이란 말 그대로 ‘그곳에 한달쯤 살아보고 싶은’ 관광객의 심리를 반영한 최근 주목받고 있는 관광의 한 형태인데, 아마도 ‘한달살기’라는 용어로 더 익숙하리라. 나는 오늘 이 한달살기로 주목받고 있는 스페인의 도시 세비야를 소개하고자 한다. 가천대학교 관광경영학과 겸임교수 이 소 윤 관광학 박사 인연은 우연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던가. 세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우연에서 시작되었다. 최근 태양의 후예 송송커플(송혜교/송중기)이 신혼여행지로 세비야를 선택하며 우연히 눈에 띄었는데, 서점에 새로 나온 스페인 관련 서적을 뒤적이다 또 한번 우연히 발견하게 된 문구. 한국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스페인의 도시 1위 세비야 순위 매기기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이럴 때에는 또 은근한 궁금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스페인의 도시라,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해진다. 사실 세비야는 관광, 건축, 도시관련 연구자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도시이다. 우리나라 청계천과 마찬가지로 오래 된 재래시장 건물이 들어서 있던 곳을 모두 철거하고 도시재생 차원의 재건축을 진행하게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처음 계획 당시인 1970년대에는 사용되지 않는 대지에 지하 주차장을 만들고 위의 대지를 시장으로 개발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개발 도중에 고대 유적이 발견되었고, 이로 인해 모든 공사 계획이 전면 중단되었다. 이후 세비야는 모든 계획을 철회하고, 30년간 유적발굴로 개발이 지연되었다. 그러다 신규 개발로 계획이 변경 발표되었고, 2004년에 이르러 국제 현상 공모를 통해 독일의 건축가인 위르겐 마이어(Jurgen Mayer) 의 계획안이 당선되면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게 되었다. 그러나 시공 단계에서 Arup이라는 엔지니어링 회사는 이 계획안이 실현하기에는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다양한 시도를 거쳐 현재의 “메트로폴 파라솔”이 완성되게 되었다. 이 메트로폴 파라솔은 현재에도 “세계에게 가장 큰 목재건축물”이라는 타이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현지인들은 이 공공시설물의 형태가 버섯과 닮았다고 하여 애칭으로 “버섯(las setas)”이라고 부르고 흔히 ‘세비야의 버섯 (Setas de Sevilla)’으로 통용된다. 혹자는 공중에 떠있는 와플 혹은 기이한 우주선의 형태라고도 표현하는데, 사실 실물을 보면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말임을 밝혀두고 싶다. 이것이 홈페이지에 있는 메트로폴 파라솔의 symbol인데, 어떠한가. 당신의 눈에도 정말 버섯처럼 보이는가. 이 목조구조물은 처음 보면 콘크리트 블록처럼 보이지만 중량을 줄이고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특수 처리된 목재를 하나하나 철골구조물 사이에 끼워 넣어 만들어진 독특한 구조이다. 한옥의 문틀처럼 끼워서 만들어진 것인데, 같은 모양이 하나도 없이 다 다른 모양이라 디자인적으로도 많은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세비야는 도시 전체가 문화유산이라고 할 만한 곳이지만 이 새로운 형태의 공공시설물은 묘하게 구도심과 어우러진다. 전망대는 6개의 기둥이 받치고 있어 이를 6개의 버섯이라고 도 부르는데, 전망대의 총 길이는 약 600m 정도이다. 구불 구불한 구조의 이 전망대를 천천히 돌다보면 세비야의 전체 모습을 다 내려다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서 보이는 뷰포인트 마다의 전망은 각양각색인 세비야의 매력을 여러 측면에서 내려다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전망대의 1층에는 거 주민들의 쉼터 공간인 kids play ground와 open형 공간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플라멩고와 버스킹을 공연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롤러스케이트를 배우는 아이들, 스트리트 보더들 이 자유롭게 어우러진다. 지하에는 발굴 당시의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과 기념품샵, 전망대로 올라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티켓박스 등이 있는데, 이곳을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이 종종 이 티켓박스를 못찾아 전망대에 올라가지 못했다는 후담을 듣게 된다. 사실 처음 방문했을 당시 본인도 전망대 입구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결국 두 번째 방문에서야 이 전망대에 오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공공시설을 단순히 현대건축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메트로폴 파라솔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세비야의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스페인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을 자거나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 즉 시에스타(Siesta)를 갖기 위해 가게 문을 닫게 되는데 시민들은 이 시간에 이곳 메트로폴 파라솔로 모여 함께 점심을 즐기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세비야는 스페인에서도 남부에 위치해 있어 한여름이면 40도를 웃도는 뜨거운 햇살이 도시 전체를 달구는데, 이때 메트로폴 파라솔은 말 그대로 도시의 거대한 파라솔 역할을 한다. 더위와 땡볕에 지친 시민들이 파라솔의 그늘 아래에 모여들게 되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플라멩고를 함께 즐기고, 또 아이들을 함께 풀어 놓기도 하고, 그곳에서 도란도란 모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시골마을 앞 큰 나무 그늘 아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평상과 많이 닮았다. 사람들은 이 공공시설을 단순히 현대건축물로 분류하기도 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 메트로폴 파라솔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세비야의 공간이라고 느껴졌다. 스페인 사람들은 한낮의 더위를 피해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낮잠을 자거나 점심을 먹으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 즉 시에스타(Siesta)를 갖기 위해 가게 문을 닫게 되는데 시민들은 이 시간에 이곳 메트로폴 파라솔로 모여 함께 점심을 즐기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혹시 세비야를 방문하게 된다면 꼭 시간을 충분히 내어 이 공공의 장소에서 스페인의 삶과 문화, 공간의 의미, 그리고 세비야의 낮과 밤을 마주하길 당부하고 싶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본인은 정작 사람들이 그렇게 극찬해 마지않는 야경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왔으니... 사실 이러한 소소한 이유들을 핑계삼아 세비야를 다시 방문할 날을 고대하고 있다. 나는 세비야의 한 여름밤을 즐기기 위해 8월쯤 머물 계획이다. 마지막으로 세비야의 그 여름을 묘사한 글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한다. 아직 세비야의 여름을 보지 못한 그대에게... 12월호 계속됩니다.